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세계포럼] 조선은 왜 망했나 (Ⅰ)

바람아님 2015. 5. 21. 09:36

세계일보 2015-5-20

 

'부패한 나라는 망한다. 조선은 부패했다. 고로 조선은 부패로 망했다.'

이런 삼단논법이 패망의 조선에도 성립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믿는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사실이니 어쩌겠는가. 수많은 사료와 증언이 뒷받침한다. 진실은 때론 가혹하고 아픈 법이다.

아산 현감으로 부임한 토정 이지함은 한 통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린다. "전하! 북방의 여진족이나 남방의 왜구 무리가 2만∼3만명만 쳐들어와도 우리나라는 반드시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목숨을 내건 늙은 선비의 절창이었다. 토정은 명확한 근거도 제시했다. "백성들이 원통해하며 근심에 잠긴 지가 한두 달도 아니고, 누구 하나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대로 조선은 14년 후 임진왜란으로 멸망 일보 직전까지 내몰린다.

망국의 위기를 부른 원인은 다름 아닌 관리의 부패였다. 그중에서도 군역이 가장 심했다. 백성들이 과중한 부담에 고향을 뜨자 관리들은 부족량을 채우기 위해 아이와 노인까지 군적에 올렸다. 심지어 나무와 바위, 개, 닭을 사람으로 둔갑시켜 군역을 물렸다. 백성에게서 나온 고혈의 상당 부분은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관리들의 학정과 탐욕은 갈수록 심해졌다. 1803년 가을엔 한 백성이 칼로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그것'을 들고 관청으로 달려간다. 문지기가 막아서자 아내는 땅을 쳤다. "정벌 나간 남편은 못 돌아오는 수 있어도 예부터 남자가 생식기를 잘랐단 말 들어 보지 못했네!" 남편이 자해를 한 이유는 군역 때문이었다. 죽은 아버지와 생후 사흘 된 갓난애를 군적에 올려 재물을 빼앗아가자 막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은 그 참상을 '애절양'이란 시에 담았다. 정약용은 "온 세상이 부패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고 탄식했다.

선각자들의 경고에도 부패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왕과 세도가들은 돈을 받고 관직까지 내다팔았다. 통상 2∼3년이던 관직의 재임기간은 구한말엔 3개월로 줄었다. 1년에 5번 수령이 바뀌는 곳도 수두룩했다. 수령을 자주 바꿀수록 뇌물을 더 많이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관찰사 자리는 10만냥, 일등 수령 자리는 5만냥으로 공정가격이 책정됐다. 수령은 뇌물로 바친 돈을 메우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짰다. 관리들은 무기마저 고철로 내다팔았다. 조선의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백만 대군이었지만 실제론 군사도 무기도 텅 비어 있었다.



배연국 논설위원
조선을 4차례 방문한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 관료들의 부정행위는 마치 히드라(머리가 아홉 개 달린 그리스 신화 속 괴물)의 머리 같아서 아무리 잘라내도 끝이 없다"고 적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쓴 미국의 퍼시벌 로웰은 "관리의 수는 적으나 그들이 곧 나라의 주인이고 나머지 사람은 인구를 늘리는 역할만 할 뿐이다"라고 개탄했다. 이런 지경이니 누구인들 나라 지킬 마음이 생기겠는가.

오늘이라고 달라졌는가. 참모총장에서 말단 군무원에 이르기까지 군사기밀을 팔아먹고 엉터리 무기를 사들인다. 정치인은 '부패 백화점'의 단골손님이다. 온 나라가 흙탕물 범벅이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온전하길 바랄 수 있나.

임란의 병화에서 왜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도 조선이 삼백년을 더 존속한 것은 기적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마침내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느님이 도우신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부패한 조선은 같은 일본에 결국 패망했다.

맹자의 경고가 가슴을 저민다. "나라도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다." 작금의 부정부패는 우리 스스로 재앙을 부르는 짓이나 다름없다. 하늘의 기적은 맹세코 두 번은 없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