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5-6-5
정조가 침실을 ‘재난 컨트롤타워’로 삼아 진두지휘한 까닭은 명쾌했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으니 곤경에 빠진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과인의 마음도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3600년 전 상나라 창업주 탕왕은 7년간이나 가뭄이 계속되자 ‘희생양’을 자처했다.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른 뒤 백마를 타서 희생의 모양새를 갖추고는 상림(桑林·뽕나무밭)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거기서 ‘문란한 정사를 펼쳤고, 아첨의 말을 듣고 어진 이를 배척했으며, 뇌물이 성행해서 백성이 곤궁에 빠졌다’는 등 자신의 6가지 잘못을 일일이 거론하며 자책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탕왕의 ‘상림육책(桑林六責)’, 즉 ‘뽕나무 밭의 6가지 자책’이다. 탕왕이 간절한 기도를 올리자 곧 꿀비가 쏟아졌다.(<사문유취·事文類聚>)
당나라와 송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당 태종과 송 태종의 일화도 인구에 회자된다. 당 태종은 메뚜기 떼가 곡식을 죄다 훑고 지나가자 들판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백성의 곡식을 갉아먹으려면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으라”면서 메뚜기 두 마리를 잡아 삼켜버렸다. 그러자 메뚜기떼가 몰살했다.(<정관정요>) 송 태종은 더했다. 메뚜기떼가 뒤덮자 “내 잘못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샀으니 내 몸을 불살라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겠다”면서 제단을 쌓아 스스로 몸을 태우려 한다. 그러자 메뚜기떼가 소멸됐다.(<송감·宋鑑>)
후대의 군주들도 탕왕과 당 태종·송 태종의 일화를 그냥 흘리지 않았다. 재난이 일어나면 모두 ‘군주의 부덕’ 탓이라 자책하면서 전전반측했다. 예컨대 영조 임금은 재해가 잇따르자 “과인이 과연 당 태종처럼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하얀 밤을 새웠다. 특히 군주가 나서 발 빠른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정조의 재난대처법은 심금을 울린다.
“재난을 당한 백성을 돌보는 것은 특히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 백성의 목숨이 달려있는 사안이다.”(<홍재전서>)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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