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선조 vs 도요토미 히데요시②

바람아님 2015. 6. 8. 21:41

(출처-조선일보 2015.05.05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1592년 5월, 엇갈린 운명


조선의 선조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양국 최고 통수권자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을 바라볼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전쟁에 임하는 두 사람의 극적인 입장 변화다. 

선조의 경우는 전쟁 초기 극도로 수세적이고 방관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조선군의 활동과 명나라 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역전된 뒤에는 그 누구보다도 호전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히데요시는 무모할 정도의 호전성으로 전쟁을 시작했으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활동으로 

예봉이 꺾인 뒤에는 소극적이고 수세적인 태도로 전환한다. 이들의 입장이 전환된 시점은 

1592년 5월이었지만, 선조와 히데요시 두 사람 모두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임진왜란 초기에 보여준 선조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다. 

초기 전황이 불리하자 선조가 평안도 북쪽 끝 의주까지 도피하고 명나라로의 망명을 타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달리 우호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선조 일행이 평양성에 들어가면서 백성들을 성 안으로 불러모아 성을 지키게 했다가, 전황이 급해지자 백성들을 버리고 

몰래 빠져나가려 한 선조 일행에 대해 평양 백성들이 “이미 성을 버리기로 하였으면서 왜 우리를 성안에 들여 넣어서 

적의 손에 희생당하게 하는가”라고 비난했다는 '징비록'의 기사에 이르러서는 조선이 이미 나라가 아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김시덕 '교감 해설 징비록' 256쪽)

어떤 사람은 이 때 선조가 무책임하게 도망친 것이 아니라,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군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 

내륙으로 이동한 러시아 국왕 알렉산드르 1세와 비견할만한 전략적 후퇴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알렉산드르 1세는 전쟁 초기부터 일관되게 "단 한 명의 프랑스 군인이라도 러시아 

땅에 남아 있다면 강화를 고려조차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를 지키던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은 "모스크바를 포기하기 전에 싸우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군대가 

지고 있는 의무"라고 생각하여 모스크바 근교 보로디노에서 나폴레옹 군과 정면 충돌했다. 양측 모두 10만 명 이상이 참전한 

이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 군은 수 십 명의 장군과 수 천 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4만 명이 전사했고, 나폴레옹 군도 3만 명 

가까이 전사했다. 이처럼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은 기본적으로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야말로 전략적 

이유에서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뒤이어 9월 14일에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들어갔지만,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를 

거부하는 가운데 겨울이 되자 나폴레옹 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알리는 것이었다.

(니콜라스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上 450-451쪽)

조선의 선조는 1592년 4~5월 사이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비견할만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조선군은 부산진 전투부터 몇 차례의 기념할만한 전투를 벌이기는 했지만, 그 규모와 결과에서 러시아 군에 비견할 수 없으며, 

전쟁 초기 조선군의 움직임을 선조가 장악하고 지휘했다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러한 측면에서, 선조가 국가와 백성을 버리고 도피한 무능한 군주였다는 오늘날의 평가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같은 도덕적 차원의 평가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인간이자 정치가로서 선조가 취한 행동이 그 자신의 

생물학적·정치적 생존을 위해 효과적이었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1925년에 출판한 '정치의 원리(Elementi di politica)'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덕적인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을 초월한 정치의 필요성과 자율성을 마키아벨리가 발견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정치는 도덕을 초월한 지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인이 논하는 도덕관념으로 정치가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정치가는 일반인의 도덕관념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또 얽매여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신각의 조선군이 양주 해유령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다. “에혼 조선군기” 권4. 김시덕 소장.
▲ 신각의 조선군이 양주 해유령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다. 
“에혼 조선군기” 권4. 김시덕 소장.

필자는 선조나 히데요시와 같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서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이러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일반 사회의 도덕율로 판단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 과정에서 마키아벨리적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선조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마키아벨리적 정치가로 변모한 것 같다.

평양에서 백성을 배신하고 의주로 피신한 선조는 급박했다. 13세기에 몽골 제국이 고려를 침공한 이래 외국에서 한반도로 
가해진 최대의 충격인 임진왜란을 선조가 초래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왜란은 한반도 세력이 방어 준비를 얼마나 했느냐와는 무관하게, 백년 간 분열되어 있던 일본 열도가 통일되자 
그 여파로 일어난 전쟁이라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2개월 뒤인 6월에 평안도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을 타진한 것은 선조가 조선의 최고통수권자라는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 그는 정치적 생존보다 생물학적 생존을 택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비겁하다"라는 도덕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수치"보다 죽음을 택하는 도덕적 선택을 하는 인간도 이 세상에는 
물론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죽음보다 수치스러운 생존을 택한다. 선조도 그러려 했을 뿐이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명나라 망명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명한다.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을 비록 갑작스럽게는 할 수 없으나 모든 일을 충분히 예비하도록 하라." 
이러한 선조에 대해 류성룡 등 신하들은 명나라로 망명하면 안되고 대신에 함경도 등으로 피난하면서 국토 수복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경상, 전라, 충청의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 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신하들은 선조가 정치적 생명을 버리고 생물학적 생명을 택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만류하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망명을 준비하던 선조는, 이러한 논의가 있은 직후에 명나라에서 군자금으로서 2만 냥을 보내고 
명나라 장군 곽몽징이 "압록강을 끼고서 명나라 병사들이 무수히 와서 주둔하고 있으니 만약 왜적의 소식을 들으면 진격함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알 수 없습니다마는 국왕께서는 장차 어느 곳으로 가시렵니까" 라고 달래자 비로소 안심하고 
정치인의 인격으로 복귀한다. 
"여기에 온 것은 오로지 명나라 병사 때문입니다. 만약 하늘의 도움을 받아 명나라 병사가 흉적을 무찔러 섬멸한다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한국고전종합 DB "선조실록"). 이처럼 선조에게는 명나라가 원군을 파견한다는 것이 가장 큰 위안이 
되었겠지만, 사실 임진왜란의 전환점은 이보다 한 달 앞선 1592년 5월에 찾아왔다.

임진왜란 전에 김성일, 황윤길, 허성 등의 통신사가 일본의 상황을 오판했기 때문에 조선이 전쟁 대비를 하지 못했으며, 
조선의 정규군이 약했기 때문에 초기에 무기력하게 패했고 의병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승기를 잡게 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조선국은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으며, 
오늘날 비판받는 것처럼 정규군이 약하지도 않았다. 저명한 군사사 연구자인 노영구 선생은 '임진왜란 의병에 대한 이해의 
과정과 새로운 이해의 방향'이라는 논문에서 1990년대 이후 임진왜란 연구 경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선, 관군과 의병은 서로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며, 의병은 관군의 일부로서 또는 관군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활동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상도 화원현의 우배선 의병 부대를 분석한 한 연구에서는 의병의 주력은 단순한 농민이 아니라 
관군으로부터 낙오된 군병인 이른바 산졸(散卒)일 가능성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아울러 의병의 군량, 무기 등은 관(官)에서 
적극 지원되었으며, 이는 당시 의병과 관군의 불가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다음으로, 조선의 군사 체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초기에 무력한 대응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통설도 
수정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의병 이해의 출발점이었던 전쟁 초기 조선군의 무력한 대응과 일방적 패전으로 이해하던 
역사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시도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군의 초기 패전을 조선의 군사 동원체제의 문제와 군사력 
미확보의 측면에서 인식하던 것에서 탈피하여, 조선군의 초기 대응과 동원체제는 적절히 가동되었으나 전술적 취약성으로 
인해 패배가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군사 체제에 근본적인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잇달아 패배한 것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위상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한반도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력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쪽 대륙에서 왔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한족의 수나라와 당나라가 그러했고, 
고려를 사실상 속국으로 만든 몽골제국이 그러했다. 이에 반해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부 유라시아의 해양 세력은 왜구로서 
활동하며 고려, 조선, 명을 괴롭혔지만 이들 국가를 멸망시킬 정도의 세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랬기에 한반도의 국가들은 
주력부대를 북방에 두었고 남방에는 왜구를 막을 정도의 세력만을 두는 것으로 국가 안보를 지킬 수 있었다.

왜구 세력과는 목적이나 규모가 근본적으로 다른 통일 일본 세력이 한반도를 공격하리라는 것은 상정외의 상황이었다. 
이것이 초기 패전의 원인이었다. 이처럼 상정외의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국왕 선조를 비롯한 엘리트 집단이 정치인으로서의 
자세를 한 때나마 망각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필자로서는 이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이들이 임진왜란 초기에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취하게 된 심층적인 메카니즘을 검토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북부를 지키던 평안도와 함경도 북쪽의 정예병이 남하하자 임진왜란의 전황이 바뀐다. 
그 전환점에 해당하는 것이 1592년 5월의 임진강 전투였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일본군에 승리한 양주 해유령 전투는 
신각(申恪)이 이끄는 함경도 병사들에 의한 것이었고,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조선군이 일본군을 선제 공격한 
임진강 전투도 평안도 병사들이 수행했다.
유극량의 조선군이 임진강의 북쪽에서 남쪽의 일본군을 선제공격하고 있다. “에혼 다이코기” 6편 권5. 김시덕 소장.
▲ 유극량의 조선군이 임진강의 북쪽에서 남쪽의 일본군을 선제공격하고 있다. 
“에혼 다이코기” 6편 권5. 김시덕 소장.

또한 1592년 5월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연이어 승리했다. 
명나라에도 조선의 상황이 보고되어 6월에는 위에서 본 것처럼 명나라군이 압록강을 넘어왔다. 
이처럼 1592년 5월은 임진왜란의 전환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즉각 깨닫지 못한 선조는 위에서 본 것처럼 6월에 명나라로의 망명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지만, 
이후 안정을 찾으면서 서서히 강경론자로 거듭난다. 
전쟁을 진두지휘한 류성룡이 명나라를 편들어 일본과 강화교섭을 추진했다는, 즉 류성룡이 비둘기파라는 이유로 
그를 비판하고, 마침내 1598년 11월에는 류성룡의 정적들이 주장하는대로 그를 삭탈관직하기에 이른다.

선조가 전쟁 발발 직후에 보여준 모습은 조선의 최고통수권자로서 선조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민관의 그러한 의심을 떨어내기 위해 선조는 강경파로서 자신을 위치지울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통치하는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하려 했던 선조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요인이 조선보다 
명나라에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세우려 했다. 위기 상황에 처한 정치인 선조가 극적으로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취할법한 전략이었고,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1592년 5월은 선조가 정치인으로서 위기를 극복한 시점이었던 동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의 운명이 바뀐 시점이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1582년 6월에 살해된 이래로, 히데요시는 언제나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의 선봉에 섰다. 
물론 그가 전투의 최전방에 선 것은 아니었지만, 안전한 후방에 앉아서 부대를 원격 지휘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는 무사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그는 규슈 북쪽의 나고야에 전진기지를 세우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선봉대에 뒤이어 금방이라도 조선으로 넘어올 기세였다. 
그의 목적은 한반도의 정복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전세계인 인도·중국(한반도 포함)·일본의 삼국을 모두 정복하고 
이를 통괄하는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 구상에 따르면 일본의 형식적 지배자인 덴노(天皇)도 삼국 황제로서의 
히데요시 아래 놓이게 될 터였다.(호리 신 '쇼쿠호 시기 왕권론(織豊期王權論)' 247-268쪽)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무력한 모습을 보이자, 그의 계획은 정말로 실현되는 듯 싶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을 함락한 5월 중순에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은 구상을 발표한다. 
"하나. 명나라 도읍으로 덴노를 옮길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2년 뒤에 행차하면 도읍 주변의 10개국을 드릴테니, 
그 영지를 귀족들에게 내리면 될 것입니다. 낮은 신분의 귀족들에게는 지금의 10배 넓이의 영지를 주고, 
높은 신분의 귀족들에게는 그 신분에 따라 구별하여 나누면 될 것입니다. 
둘. 명나라 관백은 지시대로 히데쓰구에게 물려주고, 도읍 주변의 100개국을 내릴 것입니다.
 일본의 관백은 도요토미 히데야스나 우키타 히데이에 가운데 마음에 드는 자에게 물려주십시오.
셋. 일본의 제위는 나가히토 신노나 도시히토 신노 가운데 한 분을 앉히면 될 것입니다. 
넷. 고려는 도요토미 히데카쓰나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맡기십시오" 
(김시덕 '그들이 본 임진왜란' 37쪽). 히데요시의 세계 정복 계획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구상이 발표된 전후로 임진강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선제 공격을 이끌었고,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진로를 막았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직접 조선으로 건너오려 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그를 만류했다. 
아직 일본열도가 통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자리를 비우면 다시 혼란이 초래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조선에 건너 와 있는 일본군을 감독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 오티나 요시쓰구, 
마시타 나가모리 등 유능한 행정 관료를 자기 대신에 조선으로 보낸다.

일본에서는 과연 우메키타 구니카네라는 장군이 6월에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8월에는 히데요시가 끔찍이도 아끼던 어머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사망했다. 
자신의 아들이 저 멀리 고려라는 곳에 건너가려 한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하던 오오만도코로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히데요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즈음부터 히데요시는 중화 황제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한 것 같다. 
같은 달에는 명나라의 심유경이 한반도로 들어와 고니시 유키나가와 한반도 분할 등의 조건을 걸고 조선을 배제한 
비밀 협상을 전개한다.

협상이 진행중이던 1593년 8월에는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난다. 
김성일 등 조선의 통신사 일행이 1590년에 목격한 바 있는 첫 아들 쓰루마쓰가 1591년에 요절한 이래, 
히데요시는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이 더 이상 없으리라 체념하고 조카 히데쓰구에게 일본 지배를 맡긴 상태였다. 
그러나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요시에게는 점점 절망적이 되어가는 세계 정복보다는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본 국내에서 물밑 작업을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에 임하는 히데요시의 태도는 급속히 내향적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심유경 등이 제안한 한반도 분할 제안에 따라 한반도 남부 지배를 
조건으로 화의 협상을 진행시켰으며, 히데요시는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1596년 9월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이 파탄났을 때에도 일본측 협상 책임자들이 처벌받지 않은 것일 터이다.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수립 이후 한반도가 두 번째로 분할될 위기에 처했던 임진왜란 강화협상, 그리고 협상의 파탄에 따라 
재개된 전쟁(정유재란)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