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플러스] 입력 2015-06-09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 지린(吉林)성의 성도 창춘(長春)에 출장을 자주 가게 되었다. 당시는 선양(瀋陽) 총영사관 개설되기 이전으로 지린성은 대사관 관할이었다.
창춘은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가 뻗어 있어 중국 도시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중국 공산당 지린성위원회 본부건물이 일본의 성(城)의 천수각(天守閣)을 닮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 오사카 성을 본 딴 건물로 과거 만주국 시대 일본 관동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 건국에 중심 역할을 한 악명 높은 일본 최강 정예군이다. 창설 당시 산하이관(山海關) 동쪽(당시 만주국 영역으로 지금의 동북 3성)을 지키라는 의미로 관동군이 되었다고 한다.
관동군이 사령부의 건물을 지을 때 가도정명(假道征明)이라는 황당한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임진왜란)하고 중국을 넘어 다 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못다 이룬 야망을 이루기 위해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을 재현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만주국을 건국하고 창춘을 수도로 정하면서 새로운 수도 즉 신징(新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징은 19세기 파리를 모델로 건설한 신도시였다고 한다. 창춘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린대학 기초의학원의 건물도 자세히 보면 일본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 다만 지붕은 자금성처럼 기와로 되어있어 중일합작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건물은 당시 만주국 정부의 정무원 건물이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만주국은 멸망되고 옛 이름 창춘을 되찾았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청조의 마지막 황제(선통제) 푸이(溥儀)를 만주국 초대 황제(강덕제)로 내세운 일본의 괴뢰국가였다. 국제연맹이 리튼 조사단을 파견 만주국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1933년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는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에 대한 찬반 의결이 있었다. 당시 일본 대표는 영어에 능통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1880-1946)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후에 남만주 철도회사(滿鐵)의 총재와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으로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13세 때 미국 오레곤 주의 친척집에 위탁되고 그 곳에서 미국 감리교의 후원으로 오레곤 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돌아 와서 외무성에 입부하였다가 퇴직하고 만철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마쓰오카 의원은 동양인의 영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유창한 영어로 ‘십자가 위의 일본‘이라는 논리로 국제연맹을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걸형(桀刑)에 처하였지만 그의 진실이 후에 알려지듯 국제사회는 일본을 십자가 걸형에 처하려고 하지만 일본의 정당성은 후세가 알아 줄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였다. 마쓰오카는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독교를 끌어넣은 억지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만장일치로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부인하였다. 일본은 국제연맹의 결의에 불복 탈퇴하면서 고립을 자초하였다.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만주국과 관계가 깊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이야기한다. 그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현 총리의 외조부이다. 1936년 만주국의 산업차관으로 기시 노부스케가 부임하였다. 당시 38세의 가장 잘 나가는 상공관료로서 만주국 건설을 위해 관동군으로부터 삼고초려의 끈질긴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관동군의 기대에 부응하여 만주국의 산업(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 성공시키고 1940년 일본으로 귀임한다. 1941년 관동군 참모장 출신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가 총리가 되면서 그는 상공대신으로 발탁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1896년 일본의 야마구치시(山口市)에서 사토 노부스케(佐藤信介)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토 히데스케(佐藤秀助)는 야마구치현청의 관리였다. 그는 본래 기시 히데스케(岸秀助)였는데 처가인 사토가(佐藤家)에 데릴사위로 입양되면서 처가 성을 따라 사토 히데스케가 된 인물이다. 어머니는 모요(茂世)로 야마구치 현의 명문가 사토 집안의 따님이다.
그가 태어 날 때 외증조부 사토 노부히로(佐藤信寬 1816-1900)가 기뻐하여 자신의 이름 자 노부(信)를 취하도록 허락하여 노부스케가 되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유신 이전에 죠수번(長州藩)의 관료(藩士) 출신의 노부히로는 집권세력인 도쿠가와 막부 타도(倒幕派)에 가담한 혁신가였다. 죠수번이 구주를 토벌할 때 참가한 공로로 메이지유신 이후에 시마네(島根)현의 현령이 되었다. 그가 은퇴한 후에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정치원로들이 찾아 올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고 한다.
부친 히데스케는 노부스케가 3살이 될 때 야마구치현청의 직장을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처가가 대를 이어 해오던 양조장 사업을 이어 받았다. 사토 집안은 본래 양조업(주조업)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모요가 결혼 직후에는 남편 따라 야마구치 시에 살면서 그 면허를 일시 타인에게 빌려 주었다가 남편이 사직하고 고향(布施)에 돌아와서 양조업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부부는 1889년에 첫아들 이치로우(市郞), 1896년에는 둘째아들 노부스케, 1901년에는 셋째아들 에이사쿠(榮作)를 얻었다. 첫째 둘째는 현청 말단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에이사쿠는 양조장 사장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형제 모두 머리가 좋아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마을 사람들은 세 형제 중에 ‘머리(頭 두뇌)는 첫째부터, 배짱(度胸)은 셋째부터’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머리 좋은 노부스케가 중학 3년 때 아버지 친가의 성 기시(岸)를 따르게 된다. ‘사토 노부스케’에서 ‘기시 노부스케’로 바뀌었다. 그러나 다른 두 아들은 사토 성을 그대로 쓴다. 장남 이치로는 군인이 되어 해군 중장에서 퇴역하였고 막내 에이사쿠는 형 기시 노부스케에 이어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수재들이 근무하는 내무성이 아닌 농상공성에 들어가 혁신관료로 두각을 나타낸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만주국 상공차관으로 만주국의 산업을 발전시켜 일본의 군수산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이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인연은 독(毒)이 되어 전후 도조 히데키와 함께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된다. 육군대장 도조 히데키는 사형에 처하나 문관인 기시 노부스케는 다행히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공직에서는 일시 추방되었다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자유당에 가입하면서 복권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 시게루와 대립하면서 자유당에서 제명되고 하토야마(鳩山一郞)와 함께 일본 민주당을 결성한다. 후에 민주당은 자유당과 합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되면서 자민당의 초대 간사장이 된다. 후에 총리가 되는 자민당의 총재 경선에 나섰으나 이시바시 단잔(石橋잠山)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2개월 후 이시바시 총리가 병으로 사직하여 기시 노부스케는 후임 총리가 된다.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가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의 외무대신을 역임한 아베 신타로는 3남 노부오(信夫)를 처남인 기시 노부스케의 장남 노부와(信和)에 입양시켜 기시(岸)의 성을 따르게 한다. ‘아베 노부오’에서 ‘기시 노부오’로 이름이 바뀐다. 기시 노부오는 현재 참의원 의원이다. 할아버지 대에는 형제간이 사토와 기시로 나누어지고 아베 총리에 와서는 아베와 기시로 나뉜다.
양조장 사장 집 아들인 에이사쿠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련님으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항상 우쭐한 기분으로 공부는 않고 강에 나가 물놀이 하느라고 본래 검은 얼굴이 더 새까맣게 되었다고 한다. 야마쿠치 중학을 졸업하고 구마모토의 제5고에 합격한다. 당시 시험준비를 위해 같이 하숙하면서 제5고에 합격한 친구로 히로시마 출신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에이사쿠 보다 먼저 총리가 되었다.
에이사쿠도 형과 같이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철도성에 근무하면서 형과 달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좌천되는 등 관료생활이 매끄럽지 못했다. 이것이 오히려 복(福)이 되어 패전 후 점령군으로부터 전범의 혐의를 받지 아니하고 공직에도 추방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후 정치인이 되어 형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 간사장을 할 때 총무회장으로 형의 오른 팔 노릇을 하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가 된 후 대미 자주외교를 지향 미국과 일본의 불평등 안보조약을 개정 신 안보조약을 체결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협상 결과이다. 그러나 국내의 여론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국회 비준을 강행하자 이른 바 ‘안보투쟁(1960)’이라는 대규모 민중 시위로 발전되어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직을 사직한다.
기시 총리가 사직하자 사토 에이사쿠의 친구 이케다가 총리가 된다. 에이사쿠는 이케다 총리의 총재의 3선을 막기 위해 총재 경선에 뛰어 들지만 이케다에게 패배한다. 얼마 후 이케다 총리가 병으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총리가 된다. 이는 1956년 형 기시가 총리가 된 과정과 유사하다. 형제끼리 총리가 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전임자의 병으로 총리직을 이어 받는 것도 더욱 드물 것 같다.
오는 8월 아베 담화를 앞두고 그의 뿌리이며 역사관의 원점이라고 보는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어릴 때 지역구 의정활동으로 도쿄의 자택을 자주 비우는 부친(安倍晉太郞) 대신에 외조부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외조부에 대한 추억에서인지 아베 총리가 초선의원 시절인 1995년 10월, 창춘을 방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근무한 만주국 국무원을 찾았다고 한다
창춘은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가 뻗어 있어 중국 도시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중국 공산당 지린성위원회 본부건물이 일본의 성(城)의 천수각(天守閣)을 닮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 오사카 성을 본 딴 건물로 과거 만주국 시대 일본 관동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 건국에 중심 역할을 한 악명 높은 일본 최강 정예군이다. 창설 당시 산하이관(山海關) 동쪽(당시 만주국 영역으로 지금의 동북 3성)을 지키라는 의미로 관동군이 되었다고 한다.
관동군이 사령부의 건물을 지을 때 가도정명(假道征明)이라는 황당한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임진왜란)하고 중국을 넘어 다 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못다 이룬 야망을 이루기 위해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을 재현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만주국을 건국하고 창춘을 수도로 정하면서 새로운 수도 즉 신징(新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징은 19세기 파리를 모델로 건설한 신도시였다고 한다. 창춘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린대학 기초의학원의 건물도 자세히 보면 일본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 다만 지붕은 자금성처럼 기와로 되어있어 중일합작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건물은 당시 만주국 정부의 정무원 건물이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만주국은 멸망되고 옛 이름 창춘을 되찾았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청조의 마지막 황제(선통제) 푸이(溥儀)를 만주국 초대 황제(강덕제)로 내세운 일본의 괴뢰국가였다. 국제연맹이 리튼 조사단을 파견 만주국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1933년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는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에 대한 찬반 의결이 있었다. 당시 일본 대표는 영어에 능통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1880-1946)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후에 남만주 철도회사(滿鐵)의 총재와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으로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13세 때 미국 오레곤 주의 친척집에 위탁되고 그 곳에서 미국 감리교의 후원으로 오레곤 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돌아 와서 외무성에 입부하였다가 퇴직하고 만철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마쓰오카 의원은 동양인의 영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유창한 영어로 ‘십자가 위의 일본‘이라는 논리로 국제연맹을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걸형(桀刑)에 처하였지만 그의 진실이 후에 알려지듯 국제사회는 일본을 십자가 걸형에 처하려고 하지만 일본의 정당성은 후세가 알아 줄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였다. 마쓰오카는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독교를 끌어넣은 억지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만장일치로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부인하였다. 일본은 국제연맹의 결의에 불복 탈퇴하면서 고립을 자초하였다.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만주국과 관계가 깊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이야기한다. 그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현 총리의 외조부이다. 1936년 만주국의 산업차관으로 기시 노부스케가 부임하였다. 당시 38세의 가장 잘 나가는 상공관료로서 만주국 건설을 위해 관동군으로부터 삼고초려의 끈질긴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관동군의 기대에 부응하여 만주국의 산업(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 성공시키고 1940년 일본으로 귀임한다. 1941년 관동군 참모장 출신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가 총리가 되면서 그는 상공대신으로 발탁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1896년 일본의 야마구치시(山口市)에서 사토 노부스케(佐藤信介)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토 히데스케(佐藤秀助)는 야마구치현청의 관리였다. 그는 본래 기시 히데스케(岸秀助)였는데 처가인 사토가(佐藤家)에 데릴사위로 입양되면서 처가 성을 따라 사토 히데스케가 된 인물이다. 어머니는 모요(茂世)로 야마구치 현의 명문가 사토 집안의 따님이다.
그가 태어 날 때 외증조부 사토 노부히로(佐藤信寬 1816-1900)가 기뻐하여 자신의 이름 자 노부(信)를 취하도록 허락하여 노부스케가 되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유신 이전에 죠수번(長州藩)의 관료(藩士) 출신의 노부히로는 집권세력인 도쿠가와 막부 타도(倒幕派)에 가담한 혁신가였다. 죠수번이 구주를 토벌할 때 참가한 공로로 메이지유신 이후에 시마네(島根)현의 현령이 되었다. 그가 은퇴한 후에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정치원로들이 찾아 올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고 한다.
부친 히데스케는 노부스케가 3살이 될 때 야마구치현청의 직장을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처가가 대를 이어 해오던 양조장 사업을 이어 받았다. 사토 집안은 본래 양조업(주조업)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모요가 결혼 직후에는 남편 따라 야마구치 시에 살면서 그 면허를 일시 타인에게 빌려 주었다가 남편이 사직하고 고향(布施)에 돌아와서 양조업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부부는 1889년에 첫아들 이치로우(市郞), 1896년에는 둘째아들 노부스케, 1901년에는 셋째아들 에이사쿠(榮作)를 얻었다. 첫째 둘째는 현청 말단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에이사쿠는 양조장 사장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형제 모두 머리가 좋아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마을 사람들은 세 형제 중에 ‘머리(頭 두뇌)는 첫째부터, 배짱(度胸)은 셋째부터’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머리 좋은 노부스케가 중학 3년 때 아버지 친가의 성 기시(岸)를 따르게 된다. ‘사토 노부스케’에서 ‘기시 노부스케’로 바뀌었다. 그러나 다른 두 아들은 사토 성을 그대로 쓴다. 장남 이치로는 군인이 되어 해군 중장에서 퇴역하였고 막내 에이사쿠는 형 기시 노부스케에 이어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수재들이 근무하는 내무성이 아닌 농상공성에 들어가 혁신관료로 두각을 나타낸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만주국 상공차관으로 만주국의 산업을 발전시켜 일본의 군수산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이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인연은 독(毒)이 되어 전후 도조 히데키와 함께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된다. 육군대장 도조 히데키는 사형에 처하나 문관인 기시 노부스케는 다행히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공직에서는 일시 추방되었다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자유당에 가입하면서 복권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 시게루와 대립하면서 자유당에서 제명되고 하토야마(鳩山一郞)와 함께 일본 민주당을 결성한다. 후에 민주당은 자유당과 합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되면서 자민당의 초대 간사장이 된다. 후에 총리가 되는 자민당의 총재 경선에 나섰으나 이시바시 단잔(石橋잠山)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2개월 후 이시바시 총리가 병으로 사직하여 기시 노부스케는 후임 총리가 된다.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가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의 외무대신을 역임한 아베 신타로는 3남 노부오(信夫)를 처남인 기시 노부스케의 장남 노부와(信和)에 입양시켜 기시(岸)의 성을 따르게 한다. ‘아베 노부오’에서 ‘기시 노부오’로 이름이 바뀐다. 기시 노부오는 현재 참의원 의원이다. 할아버지 대에는 형제간이 사토와 기시로 나누어지고 아베 총리에 와서는 아베와 기시로 나뉜다.
양조장 사장 집 아들인 에이사쿠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련님으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항상 우쭐한 기분으로 공부는 않고 강에 나가 물놀이 하느라고 본래 검은 얼굴이 더 새까맣게 되었다고 한다. 야마쿠치 중학을 졸업하고 구마모토의 제5고에 합격한다. 당시 시험준비를 위해 같이 하숙하면서 제5고에 합격한 친구로 히로시마 출신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에이사쿠 보다 먼저 총리가 되었다.
에이사쿠도 형과 같이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철도성에 근무하면서 형과 달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좌천되는 등 관료생활이 매끄럽지 못했다. 이것이 오히려 복(福)이 되어 패전 후 점령군으로부터 전범의 혐의를 받지 아니하고 공직에도 추방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후 정치인이 되어 형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 간사장을 할 때 총무회장으로 형의 오른 팔 노릇을 하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가 된 후 대미 자주외교를 지향 미국과 일본의 불평등 안보조약을 개정 신 안보조약을 체결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협상 결과이다. 그러나 국내의 여론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국회 비준을 강행하자 이른 바 ‘안보투쟁(1960)’이라는 대규모 민중 시위로 발전되어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직을 사직한다.
기시 총리가 사직하자 사토 에이사쿠의 친구 이케다가 총리가 된다. 에이사쿠는 이케다 총리의 총재의 3선을 막기 위해 총재 경선에 뛰어 들지만 이케다에게 패배한다. 얼마 후 이케다 총리가 병으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총리가 된다. 이는 1956년 형 기시가 총리가 된 과정과 유사하다. 형제끼리 총리가 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전임자의 병으로 총리직을 이어 받는 것도 더욱 드물 것 같다.
오는 8월 아베 담화를 앞두고 그의 뿌리이며 역사관의 원점이라고 보는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어릴 때 지역구 의정활동으로 도쿄의 자택을 자주 비우는 부친(安倍晉太郞) 대신에 외조부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외조부에 대한 추억에서인지 아베 총리가 초선의원 시절인 1995년 10월, 창춘을 방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근무한 만주국 국무원을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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