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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와 윤이상의 엇갈린 인생

바람아님 2013. 3. 26. 09:45
1945년 광복 직후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던 경남 통영 한 바닷가 선술집에 몇몇 젊은 예술인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광복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통영문화인협회'를 결성한다.

김춘수와 윤이상은 이렇게 만났다.

윤이상이 5살 위였지만 둘은 친구처럼 지냈 다.

생계를 위해 교사생활을 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이들은 파도가 넘실대는 통영 바닷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예술을 논했고 청춘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 운명이 엇갈리기 시작한 것은 57년 윤이상이 서독으로 떠나면서부터. 윤이상은 여러 음악제에서 극찬을 받으며 세계적인 작곡가로 우뚝 선다.

그러 나 67년 당시 군사정권이 조작한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면서 윤이상과 고국의 인연은 끝이 난다.

군사정권은 차관 7000만마르크를 취소한다는 서독 정부 압력에 굴복해 감옥에 있던 윤이상을 추방 형식으로 서독으로 돌려보낸다 . 같은 시기 김춘수는 국내에서 전성기를 맞는다.

'꽃' '부타페스트에서의 소녀 의 죽음' 등으로 명성을 얻었고, 경북대 교수가 됐다.

관운도 있었다.

한국시 인협회장 방송심의위원장 등 요직을 거쳐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지낸다.

윤이상이 추방된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은 80년 무렵 서독에서 마 지막 재회를 한다.

김춘수의 간청으로 성사된 만남은 정보기관원이 감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짧은 만남은 두 사람의 눈물로 엉망이 됐다.

세월이 흘러 윤이상은 결국 고국땅을 밟지 못한 채 95년 사망했고, 김춘수도 2 004년 세상을 등졌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김춘수는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 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게 죄야. 윤이상은 천재였어."  

 

격동의 현대사는 이렇게 젊은 두 예술가의 삶을 갈라놓았다.

고인이 된 두 사 람은 지금쯤 다시 통영 바닷가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지 모른다.

윤이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평가중이다 그래서 그의 부인과 지인들이 말하는 윤이상에 대해 앞으로 3~4차례

에 걸쳐 연재 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