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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4] '한국의 소리'냐 생활 소음이냐… 두부 장수 鐘 단속에 贊反 팽팽

바람아님 2015. 7. 2. 09:06

조선일보 2015-1-5

 


	경찰이 두부장수 종소리 등 행상들의 소음을 단속한다는 기사(조선일보 1962년 6월 24일자)와 소리로 아침을 깨우던 두부장수 종.
1962년 6월 서울시 경찰국이 새벽의 두부장수 종소리 등 주택가 행상(行商)들의 소음을 일제 단속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의 아침잠을 방해하고 학생들 공부에도 지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조선일보 1962년 6월 24일자). 수십 년간 아침을 열어 온 친숙한 '딸랑딸랑' 소리를 금지하는 것에 대해 언론의 견해는 엇갈렸다. 한 신문은 독특한 이유를 내세워 경찰을 비판했다. '시경(市警)의 단속이 시민들 늦잠을 보호해 주는 결과가 되면 곤란'하다며 건강을 위해 '좀 더 일찍 일어나 아침 공기 마시며 활동할 필요가 있다'고 쓴 것이다. 두부장수 종소리가 일종의 '기상나팔'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펴기 쉽지 않은 주장이었다. 이에 다른 신문은 '야근하고 늦잠 자는 사람도 많은데 행상들의 지나친 소음(騷音)은 막아야 한다'고 맞섰다.

한국인 일상의 한 부분 같던 두부장수 종소리는 아파트가 처음 등장하던 1960년대 들어 '생활 소음'으로 몰린다. 그 이전엔 숱한 종들이 이곳저곳서 울렸다. 두부장수 종소리에 새벽잠이 깬 주부는 눈 비비고 나가 따끈한 두부를 사서 받아놓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학교 종이 땡땡땡' 수업 시작을 알리고 예배당 종소리가 온 동네에 울렸던 시절, 딸랑딸랑 황동 핸드벨 소리는 두부장수의 상징이었다.

1957년 '전국일주 자전거 경기대회' 참가 선수들이 서울 세종로에서 출발할 땐 두부장수들이 땡그랑 땡그랑 종을 치며 응원전을 펼쳤다. 1968년 작곡가 강석희는 창작곡 '예불(禮佛)'에 한국의 대표적 음향의 하나로 두부장수 종소리를 넣었다. 서울시는 1957년 두부장수 종을 닮은 핸드벨을 행정에 도입했다. 청소차가 왔을 때 동네 반장들이 "쓰레기 가지고 나오세요"라고 고함치는 대신 종을 울리게 했다. 문제는 이 종을 반장들에게 적지 않은 값에 사도록 한 것이었다. 민관식 의원은 국회 단상에 종 한 개를 들고 등단해 서울시를 질타하며 "누구를 위하여 종을 파는가!"라는 명언을 남겼다(경향신문 1957년 4월 17일자).

1970년대 중반부터 두부장수 종소리는 사라져갔다. '한가하게 종을 흔들며 지겟짐 두부장수를 하다간 딱 굶어 죽기 십상'인 시대가 시작됐기 때문이다(조선일보 1980년 4월 23일자).

이제 '딸랑딸랑'종소리는 연말 자선냄비 앞의 구세군 종소리 정도만 남았다. 구세군 사관들이 신경 쓰는 건 종을 흔드는 속도라고 한다. 너무 빨리 흔들면 옛 두부장수 종소리가 되고, 너무 느리면 꽃상여 요령(搖鈴) 소리로 들릴까 봐 그 중간 빠르기로 흔든다. 두부장수 종은 사라졌지만 그 소리의 기억은 그렇게 뚜렷이 남아 있다.

김명환 사료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