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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자전거 탄 조선통신사

바람아님 2015. 9. 11. 09:08
조선일보 2015.09.10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오른쪽 판교 신도시 아파트 밀집 지역에 5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옛날 영남대로의 널다리[板橋] 주막촌과 장터거리를 지키던 나무다. 360년 전 이곳을 지나며 시를 남긴 조선 관리가 있다. "동빙고 한강 나루에서 배는 몇 번이나 늦어졌던고/ 판교 초가 주막의 길은 전부터 잘 안다네." 임금의 명을 받아 일본으로 향하던 조선통신사 남용익이었다. 창덕궁에서 청심환과 호랑이 가죽, 기름 먹인 종이, 부채를 하사받고 숭례문 나선 지 이틀 만이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 왕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 쇼군에게 보낸 외교사절이다. 주된 임무는 임금의 국서를 쇼군에게 전하는 것이었지만 이에 그치지 않았다. 문인·화가·악사·의사·곡예꾼이 포함돼 문화사절단 구실을 했다. 한양에서 용인·충주·상주·대구·청도·밀양·부산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국도였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문경새재, 도둑이 들끓어 여덟 명이 모이지 않고는 넘기 힘들었다는 청도 팔조령, 경남 밀양과 양산 사이 낙동강변 벼랑을 지나가는 작원잔도…. 옛 영남대로 곳곳에는 지금도 조선통신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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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에서부터는 도카이도(東海道)라는 길을 갔다. 막부가 있는 도쿄와 일왕이 사는 교토를 잇는 도카이도는 예부터 일본 1번 국도라고 불렀다. 19세기 화가 히로시게는 이 길 굽이굽이에 있는 53개 주막 마을을 판화에 담아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중 열셋째 숙소 요시하라의 길가 소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다.


▶조선통신사는 200년 동안 열두 차례 갔다. 일본인들은 이 진기한 행렬을 보려고 새벽부터 나와 자리를 잡았다. 잡은 자리를 비싸게 파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통신사와 시문(詩文) 나누기를 더없는 영예로 알았다. 어떤 이는 통신사가 시를 하나 써주면 이튿날 병풍을 만들어 와 낙관을 찍어달라 했다. 자기가 쓴 문집을 가져와 품평을 부탁하기도 했다.


▶다음 달 한·일 대학생들이 서울서 도쿄까지 자전거로 달리는 '21세기 유스(Youth) 조선통신사'로 나선다. 가는 곳곳에서 역사·학술 세미나와 한류 잔치가 벌어진다고 한다. 조선통신사는 진심을 다해 믿음으로 교류한다는 '성신교린(誠信交隣)' 정신이 이뤄낸 한·일 외교의 빛나는 장면이었다. 두 나라 젊은이들이 조선통신사가 갔던 길을 두 바퀴로 함께 달리며 꽁꽁 언 한·일 관계를 푸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김태익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