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밀양 비밀결사 조직원

바람아님 2015. 9. 8. 12:12

(출처-조선일보 2015.09.08 김소희 배우·연희단거리패 대표)


김소희 배우·연희단거리패 대표 사진밀양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알록달록한 냉장고 바지를 입은 이분들은 밤 10시가 다 돼 가는데도 집에 갈 생각들을 하지 않고 있는데, 
손에는 티켓 한 장씩을 들고 있다. 그 옆에 서서 셀카봉을 들고 깔깔거리는 대학생들 손에도, 건너편에서 
어린아이에게 모기 퇴치제를 뿌리는 젊은 부부 손에도 역시 티켓이 한 장씩 쥐여져 있다.

밤 10시, 이들이 한곳으로 모여든다. 극장이다. 이 밤에 어디서 이 많은 사람이 잠복하다 나왔는지, 
모이고 보니 수백명이다. 약 2주간의 밀양 여름 공연예술축제 기간, 경남의 작은 도시 밀양에선 
매일 밤 이런 일이 일어난다. 
연극 관객이 이렇게 다양하고 열정적일 수 있다는 것은 축제를 시작한 지 15년이 지나도 여전히 놀랍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솔직함과 대담함이다. 
공연이 재미없으면 할머니 한 분이 벌떡 일어나서 객석을 가로질러 나가신다. 
그 정도면 감사하련만, 앉아 있던 일행들을 함께 데리고 나가신다. "승훈이 어매야 가자, 재미없다 아이가." 
하지만 그날 밤 공연이 좋았다면 다음 날 오전부터 예약 전화에 불이 난다. 
밀양에선 SNS보다 빠르고 강력한 것이 소문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아직 놀랄 것이 더 남아 있다. 이 관객들의 끈질김이다. 
여름 야외 공연의 변수는 역시 비가 오는 것인데, 축제 기간엔 거의 어김없이 그런 날이 찾아온다. 
작년엔 극단 목화의 '템페스트' 공연 시작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배우들이 의상을 빨래처럼 짜면서 공연할 정도였다. 
빗소리에 묻혀서 아무리 질러도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관객에게 나눠준 비옷도 소용없게 된 지 오래, 모두 속옷까지 홀딱 젖었다. 
하지만 몇 백명 관객 중에 자리를 뜬 관객은 고작 10여명뿐이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객석을 사수하며 자신들이 관객임을 포기하지 않는 이 관객들. 
냉장고 바지를 입고 모기 퇴치제를 뿌리며 신분을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 이들은 공연을 지키는 비밀결사 조직원들이다. 
아비뇽이나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보러 유럽에 가겠다는 공연 애호가들은 한 번쯤 한여름 밀양을 찾아볼 일이다. 
아마 가장 생기 있고 매력적인 이 관객들 옆 좌석에 앉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