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멀리서 빈다

바람아님 2015. 9. 8. 10:39

조선일보 : 2015.09.07

 

남무성 재즈평론가 사진

남무성 재즈평론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용문사가 있어 가끔 산책을 나선다. 산사 입구까지 걷는 길이 완만한 데다 울창한 숲이 있어 사색을 즐기기에 좋다. 경내에 이르면 만나는 은행나무도 장관이다. 추정 수령 1100년이 넘는 거대한 고목으로, 아직은 때가 이르지만 노란 은행잎이 물결치는 늦가을이 되면 사찰 특유의 향내와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든 존재는 베풀기 위해 있다"는 부처의 말씀을 떠올려보면, 천년 풍파를 견뎌온 고목이 대지에 베푼 은혜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절에 오는 많은 이들이 나무의 기운이 좋다 해서 한참을 머문다. 나무 주위 울타리에 빼곡히 끼워 넣은 염원의 쪽지가 부지기수다. 흥미로운 건 대부분 자신이 아닌 가족, 형제, 친구의 행복을 소망하는 글이라는 점이다.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곳에 서면 누구나 불자의 마음이 되나 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산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한 남자의 노랫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주말마다 통기타와 마이크만으로 공연을 여는 무명 가수가 이곳의 또 다른 명물이다.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겠거니 싶은데, 뒤에 걸린 플래카드가 예사롭지 않다. '이동해의 사랑더하기'라는 제목으로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가 9년 동안 공연해서 기부한 금액이 자그마치 1억6000만원이라고 한다. 이동해씨의 원래 직업은 농부라고 한다. 그는 1억원 이상의 고액 기부자만 가입한다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다.

3000원을 그의 모금함에 넣고 떠나려는데 바위에 앉아 구경하던 커플이 즉석에서 신청곡을 부탁한다. 가수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몰랐던 곡이다. "내가 아플 때보다 네가 아파할 때 내 가슴을 철들게 했고"라는 가사가 귀에 들어온다. 멀찌감치 내려오는 길까지 그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나태주 시인의 '멀리서 빈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된다/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남무성 재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