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아베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일본은 고립될 것이다"

바람아님 2015. 10. 13. 08:38

 한겨레 2015-10-12

 

[짬] 중국 우한대 국제문제연구원장 후더쿤 교수

 

“이대로 가면 일본은 고립될 것이다.” 항일운동과 반파시즘 전쟁 분야에서 중국 내 최고 권위자이자, 국제수로(해양) 분야 전문가이기도 한 중국 역사학자 후더쿤(69) 우한대 국제문제연구원장의 경고이자 예언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체결·1952년 4월 발효)은 사실상 미국·일본 두 나라 간 거래였다. 2차 대전 때 적국이었던 일본과의 강화조약은 미국·소련·영국·중국 등 4대국이 모두 합의한 바탕 위에 체결돼야 했다. 하지만 소련은 서명을 거부했고 중국은 공산당도 국민당도 모두 참석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 그 결과 중국은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등의 귀속(영유권) 문제는 상정조차 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최대 피해자는 중국이다.”

 

 

그는 지난 8일 성균관대에서 초청 강연을 한 뒤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되물었다.

 

항일운동·국제수로 중국 최고 권위자
지난주 방한 ‘2차 대전과 중국’ 강연
“샌프란시스코조약 최대 피해는 중국”

전후 독도·댜오위다오 문제 ‘불씨’는
식민지 연쇄독립 꺼린 영국에 ‘책임’
‘일본 안보법안’ 미국에도 나쁜 영향

 

오늘날의 ‘독도 문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때 일본의 전후 영토 주권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한 미·일의 ‘담합’ 결과인 만큼, 후 원장의 말은 ‘거기에 대해 한국도 할 말이 있지 않으냐’는 의미로 들렸다. 그때 조약의 초안을 작성한 미국은 ‘한국 또한 전승국에 포함시키고 독도도 한국 귀속으로 명기했다가, 일본의 항의로 그 내용을 빼버렸으며, 결국 한국은 공식 초청도 받지 못했다. 일제 침략의 최대 피해국들과 주요 교전국들을 배제한 이 조약은 전후 동아시아 질서 재편은 물론 지금껏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날 강연 제목은 ‘제2차 세계대전과 중국의 항일전쟁’. 우한대를 나와 1970년부터 모교에서 ‘제2차 세계대전사’, ‘일본 근현대사’, ‘중국 외교사’ 등을 강의하며 부총장까지 지낸 후 원장은 “2차 대전의 승리는 중국과 세계 각국의 수백만 인민들의 희생과 맞바꾼 것”이라며 “그것은 쉽게 얻은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당의 전방전쟁(정면전장)과 공산당의 후방전쟁(적후전장)을 축으로 한 중국 인민들의 전면적 항일전쟁이 일본군의 소련을 겨냥한 북진정책, 동남아와 남서태평양을 겨냥한 남진전략, 인도와 인도양·중동을 겨냥한 서진전략 모두를 무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중의 항일전선 협력, 전후 한국 등의 독립, 유엔 창설 등 국제질서 재건에도 중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이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의미도 축소·폄훼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지난 4일 제주도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해양지리문제 회의’에도 참석했던 후 원장은 최근 아베 정권의 행보와 관련해 “한국, 중국에도 영향을 주는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말했다. “위헌적이며 위험한 신호다. 일본이 과연 평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이웃나라 사람으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일본의 ‘평화헌법’ 제정을 주도했으면서도 그 취지에 위배되는 안보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일본 편향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 장차 미국의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일본의 최근 행보는 윈윈으로 가는 시대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계속 그렇게 한다면 일본은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역사학자로서는 적절치 않은 발언일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항상 경각심을 갖고 주시하면서 경고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후 원장은 질의·응답 시간에 “1946년 독도가 전후 한국에 귀속돼야 한다고 명기한 중국공산당 연안 총사령부 작성 당안자료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2차 대전 이후 국제질서(얄타체제)의 토대가 된 43년 12월의 카이로회담 때 장제스는 ‘전후 한국을 독립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도 동의했으나 영국은 다만 ‘한국을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고만 명기하도록 내용 수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당시) 왕충후이 중국 대표는 즉각 반대했다. 왕충후이는 일본의 대륙정책이 한국의 합병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만약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한다’고만 언급하고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향후 중대한 문제들이 남게 되어 일본이 새로운 계략을 꾸밀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이유도 설명했다. “그때 영국은 만약 한국 독립을 명기하게 되면 홍콩과 말레이반도, 미얀마 등 영국이 지배하던 나라나 지역의 연쇄독립으로 연결될 것이라 보고 이를 꺼렸다. 영국은 일본이 점령했던 대만·펑후제도 등 중국 서남해 섬들과 류큐(오키나와)도 단지 일본에서 분리돼야 한다고 했을 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댜오위다오 분쟁 등의 소지를 남기는 데 일조했다. 영국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식민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때 미국의 태도 역시 영국과 닮았다. 미국은 일본을 냉전의 동아시아 교두보로 확보하고 미군 주둔을 보장받기 위해 댜오위다오와 류큐(오키나와) 등의 귀속 문제를 전범국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타결지었던 것이다. “장차 미국의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후 원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지금까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별로 변한 게 없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