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마오쩌둥이 6·25 참전한 건 '영토 욕심' 때문

바람아님 2015. 10. 5. 09:45

(출처-조선일보 2015.10.05 안용현 주북경특파원)

[베이징大 김동길 교수 논문]
저우언라이에게 電報 보내 "압록강서 평양~원산으로 中 국방선 넓힐 수 있어"

마오쩌둥이 1950년 10월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면서 "중국 국방선(國防線)을 압록강에서 평양~원산선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언급한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이는 한반도 북부로 중국의 세력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중공군 참전 이유 중 하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 중국은 전쟁 초 북한군이 승기를 잡았을 때는 참전을 서두르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참전 불가'를 소련에 통보하는 등 오락가락했던 것으로 4일 밝혀졌다.

베이징대 역사학부 김동길 교수는 이런 내용이 담긴 '중국 국방선의 무혈(無血) 확장: 한국전쟁 참전 원인'이란 제목의 논문을 
유력 학술지 '디플로매틱 히스토리(Diplomatic history)' 최신호에 게재했다. 김 교수는 마오가 1950년 10월 13일 정치국 
긴급회의에서 참전을 확정한 뒤 소련에 있던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보' 등을 입수해 논문을 썼다. 당시 전보에 따르면 
마오는 "미군과 한국군이 (중공군 참전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평양~원산선에서 진격을 멈출 것"이란 평더화이(후일 중공군 
사령관)의 주장을 소개하며 "이 경우 중국은 싸우지 않고 국가 방위선을 평양~원산선으로 확대할 수 있다. 
(참전은)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유엔군이 평양~원산선을 넘지 않을 것'이란 정보를 북한과 영국으로부터도 입수했기 때문에 이를 믿었다고 한다. 
실제 유엔군은 9월 28일 중국 또는 소련의 개입을 우려해 정주~함흥으로 이어지는 '북진(北進) 한계선'을 설치했었다. 
김 교수는 "만약 유엔군이 10월 24일 한계선을 철폐하고 북진하지 않았더라면 평양~원산 이북은 중공군의 주둔지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 논문에 따르면 마오는 전쟁 초인 7월 12일 북한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를 만나 "중국은 파병을 위해 32만명 4개 군단을 
준비한 상태"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에선 미국이 곧바로 참전을 결정하면서 미 7함대의 대만해협 파견을 발표하자 
"미군과 장제스가 중국으로 진격해 공산당 정권이 곧 붕괴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마오는 전세가 뒤집히자 마음을 
바꾼다. 섣부른 개입으로 대패할 경우, 민심(民心)이 공산 정권을 떠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