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5.10.24
[이한우의 예나 지금이나]
조선의 암흑기 명종 때 권세를 휘둘렀던 진복창(陳復昌)은 어떤 조직에서건 결코 마주쳐서도 안 되는 유형의 인물이다. 중종 30년(1535년) 문과에 급제한 진복창은 한때 권간(權奸) 김안로를 섬기며 불과 3년 만에 정4품 사헌부 장령까지 내달렸지만 김안로의 실각과 함께 힘을 잃고 지방 관직을 떠돌아야 했다. 장령 시절의 그에 대해 실록은 '경망스럽고 사독(邪毒)하다'는 극도의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오죽했으면 율곡 이이가 일곱 살 때(중종 37년·1542년) 그의 전기를 썼겠는가? '진복창은 속으로는 불평불만을 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다.' 아마도 당시 어른들의 평을 바탕으로 이렇게 진복창의 사람됨을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곡(正鵠)을 찌른 평이다.
1545년 명종 즉위와 더불어 문정왕후 윤씨와 그의 동생 윤원형이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폭정의 시대가 열리면서 진복창은 화려하게 중앙 조정에 컴백했다. 그는 한직을 떠돌아야 했던 3년 동안 이를 갈았다. 진복창에게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이란 말도 아깝다. 윤원형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잡은 진복창은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오가며 반(反)윤원형 세력을 숙청하는 틈틈이 자신을 배척했던 사림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내쫓았다.
진복창의 처세 원칙은 간단했다. 지금의 권력에 무조건 엎드리자는 것. 명종 3년 무렵 대사간에 오른 그는 좌의정 이기의 심복이 되어 이기가 시키는 대로 이기의 정적들을 마구잡이로 퇴출시켰다. 그런데 같은 해 대사헌 구수담이 이기의 부정부패를 들어 탄핵을 하자 뜻밖에 이기가 아니라 구수담의 편에 선다. 구수담은 사림들의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고 또 진복창은 구수담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록을 면밀히 읽어 보면 진복창의 변신은 구수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윤원형과 이기 사이에 틈이 생겨 윤원형이 이기를 견제한다는 조짐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낸 결과였다.
그의 면종복배(面從腹背)는 문정대비와 명종 앞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명종 4년 5월 진복창은 대사헌에 임명되자 여러 차례 사의를 표명한다. 스스로 사심이 없는 사람임을 보여주었고 두 사람 모두 거기에 감복해 진복창을 더욱 신임했다.
이에 힘을 얻은 진복창은 자신을 사헌부 장령으로 밀어준 당대의 실력자인 이조 판서 허자도 일거에 제거한다. 이어 그의 배반의 칼날은 스승인 구수담을 향했다. 구수담이 자신을 버렸다고 여긴 것이다. 결국 구수담도 진복창의 모함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구수담은 스스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참변을 당했다는 점에서 자업자득이다.
반면 당시 현명한 재상으로 불리던 상진(尙震)은 진복창 같은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살짝 보여준다. 기세등등한 진복창이 하루는 잔뜩 취해 대선배인 상진의 집에 찾아와 "상씨 어른 노래 한 곡 하시오"라고 하자 노래를 잘 못하는 상진이었지만 흔쾌히 한 곡을 불러주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내가 저자에게 모욕을 당했구나!" 진복창이 나간 후 상진의 혼잣말이다.
권세를 휘두른 지 5년째인 명종 5년 5월 조정 신하들이 대거 진복창을 탄핵하자 명종은 한사코 반대했지만 그냥 둘 경우 그 재앙이 누님과 조카인 명종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한 윤원형의 결단으로 진복창은 삼수로 유배를 갔다. 이걸로 끝이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는데 진복창은 5년도 누리지 못했다.
1545년 명종 즉위와 더불어 문정왕후 윤씨와 그의 동생 윤원형이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폭정의 시대가 열리면서 진복창은 화려하게 중앙 조정에 컴백했다. 그는 한직을 떠돌아야 했던 3년 동안 이를 갈았다. 진복창에게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이란 말도 아깝다. 윤원형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잡은 진복창은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오가며 반(反)윤원형 세력을 숙청하는 틈틈이 자신을 배척했던 사림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내쫓았다.
진복창의 처세 원칙은 간단했다. 지금의 권력에 무조건 엎드리자는 것. 명종 3년 무렵 대사간에 오른 그는 좌의정 이기의 심복이 되어 이기가 시키는 대로 이기의 정적들을 마구잡이로 퇴출시켰다. 그런데 같은 해 대사헌 구수담이 이기의 부정부패를 들어 탄핵을 하자 뜻밖에 이기가 아니라 구수담의 편에 선다. 구수담은 사림들의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고 또 진복창은 구수담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록을 면밀히 읽어 보면 진복창의 변신은 구수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윤원형과 이기 사이에 틈이 생겨 윤원형이 이기를 견제한다는 조짐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낸 결과였다.
그의 면종복배(面從腹背)는 문정대비와 명종 앞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명종 4년 5월 진복창은 대사헌에 임명되자 여러 차례 사의를 표명한다. 스스로 사심이 없는 사람임을 보여주었고 두 사람 모두 거기에 감복해 진복창을 더욱 신임했다.
이에 힘을 얻은 진복창은 자신을 사헌부 장령으로 밀어준 당대의 실력자인 이조 판서 허자도 일거에 제거한다. 이어 그의 배반의 칼날은 스승인 구수담을 향했다. 구수담이 자신을 버렸다고 여긴 것이다. 결국 구수담도 진복창의 모함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구수담은 스스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참변을 당했다는 점에서 자업자득이다.
반면 당시 현명한 재상으로 불리던 상진(尙震)은 진복창 같은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살짝 보여준다. 기세등등한 진복창이 하루는 잔뜩 취해 대선배인 상진의 집에 찾아와 "상씨 어른 노래 한 곡 하시오"라고 하자 노래를 잘 못하는 상진이었지만 흔쾌히 한 곡을 불러주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내가 저자에게 모욕을 당했구나!" 진복창이 나간 후 상진의 혼잣말이다.
권세를 휘두른 지 5년째인 명종 5년 5월 조정 신하들이 대거 진복창을 탄핵하자 명종은 한사코 반대했지만 그냥 둘 경우 그 재앙이 누님과 조카인 명종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한 윤원형의 결단으로 진복창은 삼수로 유배를 갔다. 이걸로 끝이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는데 진복창은 5년도 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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