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1.12
영화 ‘암살’에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배를 타고 수상 가옥 사이를 지나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자막엔 ‘항저우’라고 나오지만 실제 이 장면을 촬영한 곳은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시다. 1932년 일제의 검거 선풍을 피해 백범은 자싱으로 피난했고 차로 두 시간 거리인 항저우(杭州) 임시정부 청사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자싱 메이완제(梅灣街) 76호의 피난처는 백범의 침실 등 옛 모습 그대로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백범의 피난 생활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그는 일본군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에 대비해 침대 옆에 호수로 바로 통하는 비밀 탈출구를 마련해뒀다. 호숫가에는 비상시 타고 도주할 수 있는 작은 배가 항상 매어져 있었다. 그 시절 백범은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와 위장 결혼을 해 밀정의 눈을 피했다. 모두가 추푸청(楮輔成) 상하이 법대 총장이 치밀하게 각본을 짜고 도와준 덕분이었다. 백범의 피난 생활은 중국 작가 샤녠성(夏輦生)에 의해 소설화되고 5부작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주아이바오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때 여비를 100원밖에 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적었다. 현지에서 만난 추푸청의 친손녀 추리전(楮離貞)은 “백범을 존경한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집안사람들 모두가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며 “김구 선생의 손자인 김양(전 보훈처 장관) 등 후손과는 집안끼리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은 중국 각 지방정부가 임시정부 기념관을 앞다퉈 건립한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알려진 대로 상하이 임정 청사는 한국 정부가 보존을 요청해 철거 위기를 모면했다. 상하이 임정 청사와 달리 류저우(柳州)·창사(長沙)·항저우·전장(鎭江) 등의 기념관은 한국 정부가 요청해서가 아니라 뜻있는 중국인들이 보존 여론을 조성하고 지방정부에 건의해 전시관을 세운 것이다.
일제에 쫓기던 임정요인들이 2년 동안 비밀 활동을 했던 장쑤(江蘇)성 전장의 임시정부 사료진열관은 각지의 임정 기념관 가운데 가장 최근인 2012년에 개관했다. 이곳은 전직 전장 당 서기 첸융보(錢永波·85)의 20년 노력 끝에 결실을 보게 됐다. 1992년 당시 전장 당 서기 재직 시절 『백범일지』를 읽고 김구의 인품에 감동받은 첸은 임시정부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퇴직 후에도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또 “전장 인민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고난을 함께한 친구 사이”라며 시 정부를 설득해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사료진열관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장시는 도시 개발로 복원이 불가능해진 임정요인들의 숙소와 사무실 건물 대신 그들이 강연과 회합 등 항일활동을 했던 무위안(穆源)소학교 건물에 진열관을 세웠다. 첸은 “오랜 기간 고증을 하는 동안 한국 국내에선 자료가 부족해 확인이 어려웠던 사실을 새로이 밝혀내는 성과도 있었다” 고 말했다.
임정유적지=예영준 특파원, 윤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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