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 얼굴, 명성황후인가…새로운 초상화 출현

바람아님 2015. 11. 20. 00:34


뉴시스 2015-11-18



명성황후(1851~1895)의 또 다른 초상이 나왔다. 어느 집의 고서 더미에 섞여 있다가 발견된 그림이다. 박광민(63)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은 “비단 바탕에 담채를 써서 서양화 기법으로 그렸다. 초상화는 인물을 사진처럼 그리는데 비해 이 작품은 사진을 보고 1920~3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면서도 작가의 의도가 반영됐다”는 이유로 ‘명성황후 추정 어진(御眞) 작품’이라고 일단 명명했다.

화면의 오른쪽 4분의 3 면적에 흑백 태극의 한 부분을 배경으로 그린 다음, 중간 왼쪽에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인물을 표현했다. 박 연구위원은 “나라가 기울어가는 어둡고 혼란했던 시기에 명성황후가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라고 짐작했다.

화면 속 여성은 머리 위에 솜(어염) 족두리를 얹고 그 위에 어여머리를 올린 후 떠구지로 장식했다. 양쪽이 파랗고 가운데가 붉은 역삼각형 댕기로 솜족두리와 어여머리, 떠구지를 연결해 묶고 그 위에 황금 나비 떨잠을 꽂았다. 나비는 아래쪽을 향해 앉았으며 어여머리 양쪽에도 떨잠을 장식했다. 떠구지는 왕비나 후궁이 공식 행사에서 원삼을 입을 때 머리에 얹는 것이다. 왕후도 썼다는 설, 쓰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박 위원은 “순정효황후가 대수머리 위에 떠구지를 얹고 있는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왕비나 황후도 떠구지를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왕비의 원삼에는 양 어깨와 가슴에 봉황이나 오조룡(五爪龍) 수를 놓은 원보(圓補)를 장식한다. 작품 속 원보는 붉은색으로 둥근 형태만 표현했다. “원삼 안에는 저고리 삼작을 입는 법인데, 노란 원삼 안에 보이는 붉은 저고리는 왠지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슬픔을 더 짙게 해 주는 것 같아서 이 역시 작가의 의도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는 해설이다. “예전에는 황후가 아니면 노란색 원삼을 입지 못했다고 하는데, 노란색 원삼을 입은 것으로 봐 명성황후로 책봉된 이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는 초상화 전문가의 의견도 있다”고 전했다.

박 위원은 지난 5월 명성황후가 덕수이씨 집성촌인 광주군 대왕면 저푸리마을(성남시 중원구 고등동)에 묵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후손 이재복(1930년생)옹을 고등동 자택에서 만났다. 이옹은 이렇게 증언했다. “명성황후는 두포(현 옥수동↔압구정동) 나루를 건넌 후 논현과 말죽거리를 지나 우리 집으로 오셔서 며칠 묵어가셨다고 한다. 당시 나의 백부가 덕수이씨 종손인 이종필 어른에게 양자로 가셨는데, 민승호의 부인 덕수이씨는 이종필의 고모가 되시며, 나의 백부에게는 대고모님이시고, 명성황후에게는 친정 올케가 되신다. 우리는 민승호 댁을 죽동궁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죽동궁 덕수이씨 할머니가 자라신 곳으로 죽동궁의 오라버니들도 이곳에 사셨고, 왕비께서는 올케의 친정으로 피해 오신 것이다. 다섯 대의 가마가 왔다는데, 황후께서는 가장 허름한 가마를 타고 오셨다고 한다. 황후께서는 고종의 어진 한 장을 가지고 오셨는데, 떠나시면서 그 사진을 우리 집에 주고 가셨다. 고종의 어진은 이만한(60×40㎝) 정도였고, 훈장 같은 것이 달린 정장을 하셨다. 내가 어릴 때까지도 사진을 봤지만, 6·25 때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 집 바로 아래에 살던 덕수이씨 가문의 다른 댁에는 ‘왕후 사진’이라고 전해오는 사진이 있었다. 크기는(A4용지를 가리키며) 이것보다는 컸던 것 같다. 옆으로 벌어진 모자(떠구지)를 쓴 것 같은데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박 위원은 “명성황후 올케의 친정이라는 점에서 이옹 이웃에 있는 왕후 사진이 명성황후였음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대전에 사는 민형기씨 댁에도 6·25 전 서울에 살 때까지 떠구지를 한 명성황후 사진이 있었는데 6·25 때 없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미뤄 보면 아마도 명성황후 생존 시에 찍은 사진을 여러 장 인화해 관계된 분들의 집안에 한 장씩 나눠 준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는 사진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기술이 개발되기 전이어서 19.6×30.08㎝ 한 사이즈 밖에 없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명성황후 추정 어진을 그린 이는 표현주의 화가 김종태(1906~1938)일 수도 있다. 김종태의 1929년 작 ‘노란 저고리’와 명성황후 추정 어진 사이에는 겹쳐지는 이미지가 있기도 하다. 박 위원은 “명성황후 추정 어진 속 얼굴의 이목구비와 신체비는 놀라울만큼 자연스럽다. 작가들이 굳이 모델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상상 만으로는 완벽한 신체비를 표현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작자는 전해진 사진 자료를 보고 그렸을 개연성이 무척 크다”고 짚었다.

“이 어진 작품이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든, 작가의 순수한 상상의 결과물이든 그것을 쉽게 밝혀내기는 어렵겠지만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이 어진 작품을 보면서 ‘명성황후가 정말 이 작품과 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것도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앞으로 이 작품보다 더 분명한 자료가 발굴돼 잃어버린 명성황후의 어진이 확정되기를 간원한다.”

명성황후는 120년 전 을미년에 시해당했다. 올해도 을미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