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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⑤ 여성 스파이의 '전설' 마타하리(上)

바람아님 2015. 12. 4. 00:30
연합뉴스 2015-11-26

◇ 사형대에 오른 '여명의 눈동자'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0월 15일 오전 7시께 프랑스 수도 파리 외곽 뱅센의 군 사격장. 어렴풋이 밝아오는 여명을 뒤로하고 한 여성이 처형대에 섰다.


41세의 이 사형수는 한사코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했다. 10월의 아침, 서서히 밝아오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마지막 희망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요란한 총성과 동시에 전쟁에 휩싸인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장본인은 사라졌다.


 

흑발에 갈색 눈, 올리브 피부를 가진 이 사형수는 본명(마가레타 게르트루데 젤레)보다는 '여명의 눈동자'라는 뜻을 지닌 예명 마타하리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를 둘러싼 평가는 다양하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수십 편의 영화와 그보다 훨씬 많은 단행권이 나왔다. 그의 명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하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치명적인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위대한 스파이도 아니었다. 신비성과도 거리가 멀었다. 특정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조작된' 공작의 희생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00년이 다 되어가지만, 명성이 퇴색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은 '마타하리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그의 신화가 조작과 배신이 판치는 첩보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 평범한 성장기

마타하리의 출생을 둘러싸고도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네덜란드인 탐험가와 인도네시아 자바섬 사원의 아름다운 댄서 사이에 출생해 어머니로부터 남성을 홀리는 뇌쇄적인 춤을 전수했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실상 그는 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1876년 태어났다. 네덜란드 서북부 레바르덴에서 성공한 투자자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난 그는 13살 때까지 수녀원 부속학교에 다녔다. 학교생활은 엄격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부도 위기에 내몰리고, 부모가 이혼하고 나서 생활은 어려웠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대부인 사람 집에서 생활하면서 유치원 교사의 꿈을 키워온 그는 학교 교장의 성희롱을 견디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18살 되던 때 탈출구가 발견됐다. 우연히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군 대위로 근무하던 맥레오드라는 사람이 아내감을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보게 됐다. 맥레오드는 그보다 20살 연상이었지만, 새로운 삶을 찾으려는 상황에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동인도제도의 자바섬으로 간 그는 곧 절망에 빠졌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인데다 승진에 연거푸 누락된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아내에게 퍼부었다. 폭행과 외박을 밥 먹듯이 했다. 불행한 생활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딸과 아들이 태어났다.


엉망진창인 가정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가자 돌파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돌파구는 뜻밖에 가까이 있었다. 자바섬 전통 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전통춤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그에게 붙여진 마타하리라는 예명이 붙여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문란한 성생활로 성병에 걸린 남편 때문에 아들을 잃은 것을 계기로 마타하리는 귀국과 함께 이혼을 결행했다.


◇ 인생의 전환점이 된 파리행

이혼 직후인 1903년 마타하리는 프랑스로 향했다.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그는 처음에는 서커스단 일원으로 일하다 다시 화가의 모델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2년 후인 그는 서구인들에게는 낯선 이색적인 댄서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다. 아시아권 음악 전문 공연장(뮤제 기메)에서 첫 공연에서 관객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파리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물랭루주' 극장을 주무대로 이국적인 무용 공연을 이어갔다.


마타하리의 공연을 알리는 선전문은 과장된 내용이 가득했다. 자바의 사원에서 춤을 추던 고혹적인 무희가 파리로 무대를 옮겨 은밀하고 에로틱한 춤을 선보인다는 내용의 이 선전문은 뭔가 이색적인 것을 갈구하던 파리 관객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분위기를 자극하듯 마타하리는 일곱 겹의 옷을 천천히 하나씩 벗으면서 결국에는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도발적인 춤을 선보였다. 무대 배경도 늘 힌두교의 시바 나다라야 신의 조각 장식이었다. 그 신은 파괴의 신이자 춤의 신이며 동시에 결실의 신을 뜻하기도 했다.


자바 춤과 힌두교를 배경으로 한 인도 춤을 차례로 선보인 마타하리의 춤은 짧은 시간에 파리를 사로잡았다. 파리에서의 흥행 성공으로 마타하리는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전 유럽을 무대로 한 공연 기회를 자연스럽게 얻었다.

부와 권력을 가진 귀족층, 정치인, 고위 장교 등 고급 관객들이 그의 춤에 넋을 잃어갔다. 오지에서 휴가를 나온 고위 장교들에게 마타하리는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본능을 느끼게 해주는 구원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인기는 마타하리의 몸값을 치솟게 했다. 유럽을 돌면서 그는 명성과 권력에다 부까지 갖춘 유명인사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사이가 됐다.고급 매춘부가 된 셈이었다. 당연히 염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그를 유럽 정보기관들이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정보기관들 가운데 가장 집요하게 그에게 포섭의 손길을 내민 것이 바로 풍부한 자금력과 치밀한 공작원 교육 등의 명성을 지닌 독일군 정보부였다.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4개월 뒤인 1914년 11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