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1.02 김태훈 여론독자부장)
1895년 발생한 을미사변이 일본인 소행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역사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후(前後) 사정을 살펴보면 "사건이 터졌으니 기록됐다"고 쉽게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가해자의 범죄 은폐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시해 후 일본은 "일본인은 전혀 관계되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천운인지 당시 현장을 목격한 미국인과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증언으로 범죄자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제야 일본은 범행을 주도한 미우라 고로 공사와 나중에 한성신보 주필이 되는 기쿠치 겐조 등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범행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민후(閔后) 시해 세력은 대신 사건 성격을 왜곡하려 들었다.
범행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민후(閔后) 시해 세력은 대신 사건 성격을 왜곡하려 들었다.
을미사변 후 감금 상태였던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춘생문 사건'이 터지자 일본은 마침 궁궐 안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들을 고종 납치 미수범이라 몰아붙였다.
이어 한성신보등에 "서양인들이 고종을 납치하려 한 것이나 일본인이 민비를 살해한 것은 거기서 거기"라는 식의
억지 보도를 대대적으로 내보내며 범죄를 합리화해 버렸다.
처음엔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다가 막상 조선 여성을 성 노리개로 동원한 사실이 드러나자
피해 할머니들을 매춘부 취급해 버린 것과 다를 게 없다.
역사의 진실은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역사의 진실은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제대로 밝혀 기록하려는 각오가 없으면 가해 사실이 부인되거나 왜곡된다.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스스로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
흔히 독일은 나치 만행을 인정하는데 일본은 과거사를 지우려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독일도 패전 직후엔 나치 과거사를 숨기려 했다.
독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설가 귄터 그라스는 그런 모국을 향해 양심의 회복을 외쳤다.
독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설가 귄터 그라스는 그런 모국을 향해 양심의 회복을 외쳤다.
그는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서 패전 후 진실을 단단히 싸고 있던 은폐의 양파 껍질을 벗겨 낸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청소년 시절 유대인 학살 만행을 까맣게 몰랐다고 썼다.
'나는 시체의 산더미, 소각로를 보았다…믿을 수 없었다.'
미군이 보여준 흑백사진을 통해 마침내 참상을 목도한 소년 그라스는 절규했다.
"독일인이 그런 짓을 했다고요? 독일인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요."
그라스는 이처럼 과오를 숨기려 했던 조국을 꾸짖고 자신도 나치 소년단에 가입했었다고 고백했다.
이런 노력이 쌓여 지금의 독일이 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번 위안부 합의 이후 더 이상 사과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국을 향해서도 "위안부 문제를 더는 거론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동의할 수 없다.
훗날 일본 후손들로부터 "일본인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이번 합의를 구실 삼아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해선 안 된다.
합의 정신을 살리려면 오히려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역사 기록으로 남겨 반성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우리도 '사과받았으니 끝'이라고 해선 안 된다.
경기도 퇴촌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는 위안부 피해를 처음으로 증언한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말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한다.'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찾고 기록해야 할 이유를 웅변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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