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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치] 아베 신조, 그 혈통과 성장의 비밀

바람아님 2016. 1. 17. 00:29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6.01.16 00:01

[월간중앙]

70대 일본 정치전문기자(노가미 타다오키, 野上忠興)가 작심 폭로한 일본 현직 총리의 내면 풍경… 요령주의로 보낸 젊은 시절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두 번씩이나 총리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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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굶주린 소년은 독재자가 되었다”


일본 출판계에는 ‘폭로서적’이라는 장르가 있다.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유명인이나 화제가 된 사건 등에 대해서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변인물이 나서서 지금까지 숨겨온 내부사정을 폭로하는 책을 말한다. 폭로를 당한 유명인은 당연히 분기탱천하여 기자회견을 열거나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언론, 출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기된 일본국 헌법 제21조의 규정이 승리한다. 특히 폭로된 인물이 ‘공인’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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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일본에서 초특급 ‘폭로서적’이 발표되자 출판 직후부터 줄곧 아마존 재팬의 정치서적 부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타이틀은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 책의 표지에는 ‘그 혈통과 성장의 비밀’, ‘사랑에 굶주린 소년은 독재자가 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렇다. 이 폭로서적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물은 일본 최고의 권력자인 아베 신조(61) 총리다.

필자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전 총리,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1924~1991) 그리고 아베 총리 본인의 3대에 걸쳐 50년 가까이 일관되게 아베 일족을 취재해온 노가미 타다오키(野上忠興, 75) 전 <교도통신> 정치부 차장이다.

이 책은 1960년, 다섯 살의 아베 신조가 외조부의 집에서 ‘안보 반대!’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태평양전쟁 당시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상공각료를 역임한 일로 인해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스가모(巢鴨) 형무소에서 3년 반 동안 복역하였다.

1948년 연말에 석방된 후 1955년에 창당한 자민당의 초대 간사장이 되고, 1957년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1960년 7월 기시 총리는 일본 국민의 대부분이 반대하는 일·미 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억지로 밀어붙인 후 퇴진했다.

그 몇 개월 전부터 안보 반대파들이 기시 총리 자택을 둘러싸고, ‘안보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 구호의 의미를 모르는 다섯 살의 신조는 집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를 흉내내면서 ‘안보 반대!’라고 외쳐댔다고 한다.

집안 사람들은 ‘안보 찬성!’이라고 외치라고 신조를 나무랐지만, 신조는 어른들의 말에 따르지 않고 ‘안보 반대!’라고 계속 외쳤다.

그것은 정치가와 정치가 부인이던 부모가 거의 매일 집을 비웠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 어린 소년이 주위에게 자신을 좀 신경 써달라는 항의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수십 년 뒤 아베 총리는 노가미 기자에게 그 당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 역시 평범한 가정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보면 친구가 부모님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다거나 아버지와 즐겁게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거기에 비해 우리 집은 아버지는 거의 집에 없었고, 어머니도 선거구인 야마구치현(山口縣)으로 내려가는 날이 많았다.”

상처 입어도 절대로 울지 않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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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총리는 늘 집을 비우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구보 우메(久保ウメ) 라고 하는 가정부에 의해 길러졌다. 이미 고인이 된 구보 우메 씨는 생전에 노가미 기자에게 소년 시절의 아베 신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저는 요코씨(아베 총리의 어머니)의 말씀도 있고 해서 예절교육에 엄격했습니다. 낮에 못된 장난을 쳤을 때에는 신짱(아베의 애칭)을 목욕시키면서 심하게 꾸짖거나 벗은 엉덩이를 손으로 찰싹! 때리면서 타이른 적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짱은 절대 울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넘어져서 상처를 입어도 절대로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 대신 신조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우메 씨에게 언제나 응석을 부렸다고 한다.

“신짱은 업히는 걸 좋아해서 제가 늘 업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아베 저택은 2층에 부부 침실이 있고, 1층에 신짱 방과 히로짱(2세 위의 형 히로노부: 현재 미쓰비시상사 패키징 사장)의 방, 그리고 제 방이 있었어요. 신짱은 밤이 되면 제 이불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신짱는 중학생이 되어도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서 내 방으로 들어와 ‘우메 아줌마, 나 들어가도 돼?’라며 제 이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너는 이제 중학생이잖아’라고 말해도 밤마다 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만큼 애정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지요.”

소년 시절의 신조는 방과후가 되면 부모가 없는 자택에 수많은 동급생을 불러들여 영화촬영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신조가 영화감독 역을 맡고 동급생들에게 배우 역할을 시키면서 자신이 그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것이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서, 항상 사람 위에 서서 주위에 명령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한편 신조는 요령이 좋은 소년이었다. 공부를 싫어해서 숙제는 가정부인 우메 씨가 대신했다. 우메 씨가 “학교 숙제는 했니?”라고 물으면, 신조는 언제나 정해놓은 것처럼 “지금 끝났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조가 잠든 후에 우메 씨가 노트를 확인해보면 항상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고 한다.

유일한 대학 동문을 납치문제 담당 각료로 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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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가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자 부친은 최고학부인 도쿄대학의 히라사와 쇼에이(平澤勝榮)라고 하는 대학생을 가정교사로 고용했다.

히라사와는 ‘형님’이 되어 공부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신조의 야구놀이 상대를 해주기도 하고, 함께 외출하여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 여름방학에는 1주일이나 자신의 고향인 기후현(岐阜縣)까지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히라사와는 노가미 씨에게 다음과 같이 당시 기억을 들려줬다.

“신조보다 형인 히로노부 쪽이 가르치기 훨씬 수월했습니다. 히로노부는 무척 서글서글한 성격에 절대로 적을 만들지 않는 타입으로, 가르친 대로 정확히 해놓은 학생이었습니다. 반면 동생인 신조는 절대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사람을 질리게 하는 질문을 연거푸 해댔습니다. 하늘은 왜 파란가요?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정치가로 적합한 쪽은 확실히 신조 쪽이었습니다.”

히라사와는 현재 아베 총리가 총재를 맡고 있는 자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다. 자민당에는 ‘5선만 되면 각료 입각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그런데 히라사와는 이미 7선 의원이지만 아직 한 번도 각료에 발탁된 일 없이 아베 총리에게 완전히 냉대를 받는다.

“위대한 독재자의 알리고 싶지 않은 소년시절을 알고 있는 유일한 국회의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노가미 씨의 분석이다.

아베 신조는 고교생이 되면서 부친으로부터 “최고학부인 도쿄대학에 진학하라”라는 말을 들었다. 명문인 아베 일족은 대부분이 도쿄대학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대학은 도쿄대학밖에 없다!”라고 소리치며 사전을 신조의 머리를 향해 집어 던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부를 싫어하는 신조는 이에 반발하여 단 한 번도 수험 공부를 제대로 한 일이 없었고, 부속 초등학교에서 부속 고교까지 다니던 사립 세이케이 대학(成蹊大學)에 그대로 입학해버렸다.

아베 총리의 학력 콤플렉스에 대한 에피소드는 꽤 많이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2006년 처음으로 총리에 취임했을 때 <아름다운 나라>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2012년 연말에 두 번째로 총리에 올랐을 때 이 저서를 <새로운 나라에>라고 타이틀을 바꿔 다시 출판했다.

그때 본문은 대부분 바꾸지 않았는데, 저자 약력란만 ‘세이케이 대학 졸업’이라는 학력을 잘라내버렸다.

또 아베 총리는 자신보다 똑똑한 정치가를 주위에 두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아베 내각은 역대 내각에 비해 도쿄대학 출신 각료가 적다.

아베 총리는 특히 도쿄대학 수석 졸업생들이 주름잡는 재무성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아베 총리의 부하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베 총리는 재무관료를 ‘일행분들(御一行樣)’이라며 항상 엄격히 대한다고 한다.

‘일행분들’이란 총리관저에 혼자는 오지 못하는, 용기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별칭이다. 덧붙이자면 전 국회의원 722명 중 세이케이 대학 졸업생은 아베 총리와 후루야 게이지(古屋圭司) 의원뿐인데, 아베 총리는 후루야 의원을 납치 문제담당 각료에 발탁했다.

대학 시절의 신조는 새빨간 외제차 ‘알파 로미오’를 몰고 대학을 다니며 양궁 동아리 여학생들과 어울리거나 마작을 하거나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열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부는 전혀 취미가 없었지만 낙제한 일은 없었다고 한다. 어학수업에 낙제한 동급생이 “너는 어떻게 합격했나?”라고 물으니, 신조는 “그런 건 요령이야, 요령!”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규모가 작은 양궁 동아리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 아베 총리는 후년에, 이렇게 털어놨다.

“스키나 테니스 동아리는 처음부터 잘하는 학생들이 가입하니 나는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양궁은 누구나 거의 처음 배우는 것으로 출발점이 모두 같아서 시합에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역시 여기에서도 그의 요령이 장점을 발휘해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체전 등의 대회에 출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노가미 씨가 대학 시절에 아베 총리와 같은 지도교수의 세미나 학생이었던 여성에게 전화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확실히 저는 아베 씨와 같은 세미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아무리 기억해보려 해도 정말로 아무런 인상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없어요.”

노가미 씨는 세이케이 대학을 방문해서 아베 총리의 대학 시절 졸업논문 담당교수와도 인터뷰했는데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아베 군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며, 경제·재정·금융 등 까다로운 수업은 처음부터 수강하지 않았다. 졸업논문도 불과 몇 장 정도밖에 쓰지 않아서 세이케이 대학에 남아있지 않다.”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신조는 졸업하면 관료가 되어라”라고 말했지만 어렵기로 유명한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졸업 후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의 영어학교에 ‘유학’했다.

그러나 외로움을 참을 수 없었던 신조는 콜렉트콜(수신인 요금지불 통화)로 일본의 집에 자주 전화를 걸어 국제전화비만 한 달에 10만 엔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이 아버지 신타로 씨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1년 수개월 만에 억지로 귀국하게 되었다.

1979년에 귀국한 신조는 고베제철소에 취직해서 샐러리맨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효고현(兵庫縣) 용광로에서의 공장근무를 견딜 수 없게 되어 결국 병원에 입원해버린다.

1982년에 아버지 신타로 씨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에서 외무대신에 발탁된 것을 계기로 신조는 고베제철소를 그만두고 외무대신의 비서관으로 채용되었다.

아버지는 명 외무대신으로서 3년 8개월 동안 총 81개국을 방문했는데, 신조에게는 이때 보고 들은 것이 지금까지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

“당신, 그러고도 남자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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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일본을 대표하는 제과업체인 모리나가 제과(森永製菓)의 사장 딸과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8세 연하인 아키에(昭惠) 씨는 하라주쿠(原宿)역에서 처음 만난 날 30분이나 지각을 하는 바람에 신조를 화나게 했다.

그러나 함께 골프를 하고 데이트하는 사이에 마음이 끌리게 된 두 사람은 1987년에 결혼했다. 그 2개월 후에 누구보다도 존경하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타계했다.

노가미 씨는 이때 쯤 아버지 신타로 외무장관의 담당기자로서 “신조를 당신의 후계자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신타로 외무장관은 단호한 말로 부정했다. “말도 안 된다. 신조에게는 정치가에게 필요한 ‘정’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저래가지고서는 정치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1991년 5월, 아버지 신타로가 췌장암으로 67세로 급사했다. 당시 37세의 신조는 밤새도록 우는 바람에 아키에 부인이 “당신, 그러고도 남자라고 할 수 있어요?”라고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신조는 1993년의 총선거에서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입후보, 9만 7647표를 획득하면서 야마구치(山口) 1구에서 톱으로 당선되었다.

이때 일은 막 정치부 기자가 된 나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국회에 초선의원들이 첫 등원할 때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의원으로서의 포부를 밝히는 관습이 있다.

대개의 의원들은 “자신은 아직 미숙하고 젊기 때문에 선배의원들의 가르침을 따라 하루 빨리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는 의원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라는 ‘고정문구’를 진술한다. 그러나 아베 신조 의원만은 당당하게 이렇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제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일본국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미국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 아닌 일본의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신인 정치가인 아베 신조 의원은 자신감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리 ‘기시 전총리와 아베 가문의 후광’이 있다고 한들 수재들이 모여 있는 정계의 정책논쟁에서 좀처럼 존재감을 피력할 수 없었다.

때문에 아베 의원은 상당히 오랫동안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정치가 아베 신조가 몰두한 것은 당시로선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였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적지 않은 일본인이 북한 스파이에 의해 일본에서 북한으로 납치되었는데 그 사람들을 구출하자는 운동을 벌인 것이다.

풍향이 바뀐 것은 2001년 아베 신타로의 정치 후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가 총리가 되고 나서다. 고이즈미 총리는 다음 해인 2002년에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김정일 총서기와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때 일본 정계에서는 대북(對北) 유화파와 강경파가 심하게 대립했다. 고이즈미 정권에서 관방 부장관을 맡고 있었던 아베 신조는 강경파의 대표격이었다.

그리고 다수의 일본 국민이 강경파를 지지함으로써 ‘납치의 아베’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아베 신조 관방 부장관은 일약 영웅이 되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아베의 이러한 인기를 감안해서 자민당 넘버 2인 간사장에 전격 발탁했다. 2003년 9월 21일 아베 신조의 49세 생일날이었다. 그 직후에 아베 저택을 방문해 어머니인 요코 씨를 취재한 노가미 씨는 요코 씨가 흘리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신조는 남편(신타로)보다 열네 살이나 젊은 나이에 간사장이 되었다. 출세의 계단을 지나치게 빨리 올라가는 게 걱정이다.”

요코 씨의 걱정은 4년 후에 들어맞게 된다. 2006년 9월 26일, 5년 8개월 동안 계속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퇴진하고, 신조는 52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제1차 아베 내각은 ‘제멋대로 내각’, ‘친구내각’ 등의 야유를 받았다. 아베 총리의 자기 멋대로인 성격이 그대로 노출되며 그 주위에는 아부와 추종에 뛰어난 ‘친구’들만을 두려 했기 때문이다.

1차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하강 일로를 걸었고, 거기에 아베 총리의 지병인 궤양성대장염이 악화되었다.

결국 발족한지 정확히 1년 후에 아베 총리는 게이오 대학병원에서 실의에 빠진 채 퇴진 기자회견을 열고, 아베 내각은 붕괴되었다.

이후는 ‘제 멋대로며 무책임한 도련님 정치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고난의 5년’을 경험하게 된다.

“출세의 계단을 지나치게 빨리 올라가는 게 걱정”

2012년 9월에 실시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 아베 신조가 재기를 도모하며 입후보했을 때만 해도 그는 5명의 후보자 가운데 ‘넷째 후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톱을 달리고 있었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郎)의 장남 노부테루(伸晃) 간사장이 TV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피해자들을 이단의 종교집단 같다는 ‘실언’을 해서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2위였던 아베 신조의 ‘형님 격’에 해당하는 마치무라 노부다카(町村信孝) 전 외무장관은 입후보한지 4일 후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3위를 달리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정책조사회장도 자민당의 장로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 기세가 꺾이고, 결국 4위였던 아베 신조가 자민당 총재로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3개월 후 실시된 총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함으로써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시동을 걸게 된다. 정말로 천운의 주인공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부활이었다.

두 번째로 총리 자리에 오른 후의 아베 신조에 대해서는, 이제 와서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익적인 발언을 되풀이하고, 외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위험한 안전보장 관련법을 성립시켰으며, 박근혜 정권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여기고 있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다. 그리고 국민들이 크게 기대했던 아베노믹스는 어느 사이에 흐지부지 존재감조차 잃고 말았다.

사실 이 폭로 서적을 출판한 노가미 씨는 대선배 정치부 기자다. 75세가 되는 현재도 매일 국회의사당이 있는 나가타초(永田町)를 뛰어다니며 정치분야 취재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 노가미 씨가 이번 ‘생애를 건 폭로 서적’을 출판하여 큰 화제를 모은 것을 축하하는 회식을 가졌다.

아베 총리가 명예훼손으로 송사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내심 걱정했지만, 현재까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한다. 헤어질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걱정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노가미 선배님, 겨울이 되니까 추위 조심하세요. 그리고 암살자도 주의하세요!”


콘도 다이스케 日 <주간현대>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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