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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교수의 지식콘서트] '한국에 교양 시민은 있는가'

바람아님 2016. 2. 12. 16:00

(2014년 3월 18일 저녁 7시​)


[송호근 교수의 지식콘서트] '한국에 교양 시민은 있는가'

2011년 서울 우면산에 산사태가 났을 때였다. 서울 서초동 일대가 난리였다. 

마침 인근에 살고 있어 이 사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유심히 지켜봤다. 

지역 주민들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얼마나 자발적으로 나서는지가 궁금했다. 예의 한국적 공식이 반복됐다. 

처음엔 관(官), 다음은 군(軍), 그리고 난 다음 소수 주민이 나섰다. 그것도 주부들이었다. 

자녀를 군에 보낸 이들 눈에 군인들이 고생하는 게 딱해서 나온 것이었다. 

교육수준이 가장 높다는 곳의 사정이 이랬다. 

지역공동체의 긴급 현안을 두고 구성원이 외면하거나 방관했다는 사실은 우리 민주주의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 

반면 정치나 시민의식이 경제에 걸맞게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를 달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결국 시민의식이 지탱하는 정치 체제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에서는 정치 성장의 견인차가 되야 할 주체인 교양 시민이 성장하지 못했다. 

이 문제야말로 정치권과 더불어 우리 시민사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당면 과제다.

시민은 원래 근대 유럽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천부인권 사상과 자유시장이 바탕이었다. 

주권을 가진 개인이 사회와 국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공적 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자유주의의 형성 주체였다. 

그 과정에서 시민은 자유와 통제, 사익과 공익을 조화하는 지혜를 내면화했다.

1840년대 독일에서 형성된 교양시민이 전형이다. 

대개 전문가나 종교인·예술가·상공인 계층이었다. 이들은 공적 윤리와 세속적 경건성을 겸비한 존재였다. 

기독교와 교양이 결합된 형태로서 교양시민(Bildungsburgertum)이 바로 독일 자유주의를 꽃피운 핵심이었다.

여기서 교양이란 ‘사욕(私慾)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을 토대로 하고 있다. 

반듯하게 살면서 종교적 신심을 배양하는 것을 교양으로 수용한 것이다. 

여기서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된 시민 계급의 기독교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유럽에서 시민의 양식(良識)은 부르주아의 자존심을 상징한다. 

이는 돈으로만은 살 수 없는 언어·의복·예술 같은 생활양식을 포괄한다. 

헤세나 괴테, 토마스 만으로 대표되는 독일 교양 소설에 나온다. 

시민 계급이 성장 과정에서 겪는 개인성과 사회성의 갈등과 조화,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내면 윤리의 긴장이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에서도 중산층 시민은 요건은 경제력(아파트나 자동차 소유 여부 등)에 그치지 않는다. 

더불어 요리, 음악, 외국어 구사 같은 것도 포함된다. 

미국은 여기에 여행과 재즈 같은 취미를 가졌는지 여부가 곁들여진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어떤가? 

아파트와 자동차만 있으면 그만이다. 

경제력만으로 중산층을 평가하게 된 것은 급속한 경제 성장의 부산물이다. 

그 결과 ‘교양 없는 중산층’이 탄생한 것이다. 

한국의 시민 계급은 ‘가문의 영광’이나 ‘청운의 꿈’ 같은 출세 욕구를 통해 성장했다. 

개발 시대의 ‘성장 질주’를 통해 시민 계급의 신작로가 닦였지만, 정작 그 안을 채우는 콘텐츠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겉만 시민인 비정상적 중간계급이 태어난 셈이다.

오늘날 한국의 중산층이 가장 힘을 쏟는 것은 내 집 마련과 자녀 교육이다.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도 이 두 과제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민주사회의 주춧돌이 되어야 할 교양의 형성, 자기 성찰과 반성의 문화는 발육 부진에 처했다.

최근 ‘안철수 현상’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새 정치’를 들고 나왔지만, 정작 ‘어떻게’와 ‘무엇을’이 빠져 있다. 

그 해답의 실마리는 결국 시민계급의 활성화에서 찾아야 한다. 

영국에서는 성인 중 80%가 시민단체 회원이라고 한다. 

얼마 전 강의 중에 대학생들에게 시민단체 가입 여부를 물어본 적이 있다. 단 한 명도 없었다. 

독일은 지역마다 계급을 떠난, 말하자면 ‘계급장 떼고’ 지역 사회 현안을 논하는 모임이 많다. 

대기업 임원에서 아파트 경비원까지 각계각층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벌인다. 이런 풀뿌리 커뮤니티에서 나온 얘기를 

통해 정당의 정책이 출발하고 소통의 장이 마련되어 정당 정치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반상회는 대체로 주부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조찬 모임은 많지만, 이마저 대개 명망가 위주다. 저변의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한다. 

엘리트 중심 민주주의가 한국 민주주의의 자화상이다.

19세기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은 당시 미국 사회를 돌아본 후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펴냈다. 

여기서 토크빌이 주목한 점은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풀뿌리 시민사회였다. 

당시 미국 사회는 어딜 가나 지역에 교회가 있고, 이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커뮤니티가 마을의 당면 과제를 의논했다. 

이를 통해 재난이나 질병, 범죄, 교육 등 사회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 토크빌의 관찰이었다.

사실 한국 사회도 일찌기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적이 있었다. 

갑오경장 이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였다. 이때 자발적 결사체가 급속히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일제 합병에 의해 괴멸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는 일제에 의한 경제 수탈의 피해를 이야기하지만,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민주주의의 싹이 잘려나간 것이 

더 심각한 폐해였다. 

식민지화에 뒤이어 해방, 6·25전쟁과 근대화·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는 압축적 발전 과정에서 자율성을 지닌 자발적인 

시민계급의 형성은 지체됐다. 

민주화 이후 각종 권리와 이익의 주장이 분출했지만 권리와 평등 투쟁 일변도로만 향했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보면 이런 정서를 대변하는 내용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결국 ‘시민 민주주의 (Civic Democracy)’로 요약된다. 

이는 시민단체에 회원이 되거나 자발적 결사체에 동참하고(시민참여), 권리와 책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자각하며(시민권), 

양보와 헌신에 입각한 공공선을 추구하는(시민윤리) 체제다. 

이런 행동양식을 배양하고 시민적 공론을 반영하는 정당 정치 체제가 바로 시민 민주주의다.

시민 참여가 부족하다고 했지만 곳곳에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태안 기름 유출 사태에서 국민들이 보여줬듯이 우리에겐 잠재력이 있다. 

이 잠재력의 휴화산에 불씨를 던지는 계기를 어떻게 마련해갈 것인지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사회의 품격이란 시민윤리에서 나온다.

< 작성자 :얕은 물 (http://blog.naver.com/bec5483/150190488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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