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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란도셀 열풍과 克日

바람아님 2016. 3. 4. 07:18

(출처-조선닷컴 2016.03.04 김미리 문화부 기자)


김미리 문화부 기자이맘때면 초등학교 입학생을 둔 학부모들은 가방 고르기 전쟁을 치른다. 
내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가방 사주려는 마음, 부모라면 다 같다. 
엄마 취향을 넌지시 드러내고픈 과시욕까지 더해지기도 한다.

최근엔 일본 초등학생 국민 가방이라는 '란도셀(Randsel)'이 인기다. 
인터넷에선 100만원이나 하는 고가 란도셀 가방을 '직구'로 반값 '득템'했다는 쇼핑 후기도 여럿이다.

조부모도 가세한다. 
1940~60년대 책보 들던 그 세대에 가죽 냄새 진한 란도셀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책, 도시락 뒤죽박죽 섞이던 책보 앞에 칸 구분 명확하고 책 구겨질 염려 없던 란도셀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시절 넉넉잖은 형편 탓에 란도셀은 언감생심이던 조부모들이 손자를 통해 대리만족하려고 쌈짓돈 푸는 건 이해된다.

그런데 이 조그만 가죽 가방에 한국인이라면 목에 걸릴 가시 같은 '역사'가 숨어 있다. 
'일본가방협회 란도세루공업회'에 따르면, 란도셀은 1800년대 후반 일본 에도(江戶) 막부 말기 서양식 군대제도를 도입하면서 
네덜란드에서 육군 보병용 배낭을 들여온 데서 비롯됐다. 
네덜란드어로 배낭을 일컫는 단어인 'ransel'이 '란도세루'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바뀌었다.

이 군용 배낭이 학교 가방으로 쓰이게 된 사연은 더 놀랍다. 
다이쇼(大正·1912~1926년 재위) 일왕이 왕세자였던 1887년 일본 귀족 자제 교육기관인 학습원(学習院)에 입학했을 때,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왕세자 입학을 축하하는 선물을 준비했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학교 가방 란도셀의 효시다. 
이토 히로부미가 누구인가. 
조선 침략에 앞장서고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원흉,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인물이란 사실은 초등학생도 안다. 
다이쇼 일왕 시대, 일본은 3·1만세 운동을 무력으로 억눌렀다. 
딱딱한 가죽 가방 안엔 이렇듯 한국인으로선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 역사가 스며 있다.

일본군위안부를 다룬 영화 '귀향'과 일제 강점기 민족 시인 윤동주를 다룬 영화 '동주'가 요즘 화제다. 
'역사를 잊지 말자'는 자발적 목소리가 자칫 묻힐 뻔한 두 영화를 살려내는 마당에 
한편에선 란도셀 열풍에 빠지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란도셀을 구입하는 학부모의 취향을 탓할 수만은 없다. 제품으로만 볼 때, 란도셀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웬만한 충격에는 흠집 날 것 같지 않은 견고한 인상, 거기다 품질은 믿고 산다는 일제다. 
130년 전 디자인인데 원형은 유지하고 무게나 재질만 조금 바꿔 전통을 고수한  대표적인 '타임리스 디자인
(timeless design·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디자인)'이다. 
우리에게 이런 학생 가방이 있는가 싶다.

란도셀에 깃든 제국주의 과거사를 언급한 것은 "그러니 이 가방을 쓰지 말자"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달성해야 할 극일(克日) 과제 중엔 일본 제품에 맞서 당당히 품질로 이기는 것도 포함돼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