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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임시정부 부정하는 일본의 속내

바람아님 2016. 2. 29. 18:40

(출처-조선닷컴 2016.02.29 호사카 유지 독립기념관 비상임이사·세종대 교수)


호사카 유지 독립기념관 비상임이사·세종대 교수 사진내일은 제97주년 3·1절이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해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비폭력운동으로 식민 지배하에 있던 

민족이 독립을 호소한 운동이었다. 

일제는 무자비하게 이 운동을 탄압했으나 그 후 한국에 대한 무단(武斷)통치를 끝내고 출판·언론 등에 

일정한 자유를 주도록 했다. 

이 3·1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일본에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려는 언설을 쉽게 볼 수 있다. 

출판물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 

'연합국의 승리로 한국이 독립한 것이지 임시정부가 한국을 독립시킨 것이 아니다', 

'한국 국민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다' 운운하면서 현 대한민국의 기원을 부정하고 

그 위상을 땅에 떨어뜨리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역사를 제대로 본다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탄생의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日王) 생일연과 일본군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에 임시정부가 

보낸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다. 

이후 윤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아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당했다. 

그런데 이 의거(義擧)를 접한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감탄했고, 

이후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이후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을 상대로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합의를 이끌어내고, 중국군과 광복군이 항일전에 참여한 것 모두 임시정부의 항일 투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아베 노부유키 조선 총독은 1945년 8월 10일 라디오의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미리 알았기에 

여운형을 찾아가 한국의 치안 유지 권한을 이양했다. 조선총독부는 사실상 한국에 항복한 것이다. 

이때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 여운형은 1919년 재일 유학생의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했고 임시정부 창건에 

힘을 쓴 인물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해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했는데 이때 서명한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상은 윤봉길의 폭탄 투척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인물이다. 

이런 역사는 임시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이끌어내는 데 힘을 썼음을 증명하고 있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 장제스 총통은 "윤봉길 의사의 가족은 잘 있는가?"라고 묻고 

"귀국하면 잘 돌봐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은 거의  다 임시정부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저명 저널리스트 중에는 "한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신화를 만들어 반일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라는 식의 

몰상식한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이 한국과 우호관계를 원하고 한·미·일 공조를 원한다면 이런 잘못된 인식을 

확산시키는 언설이나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