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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홀로코스트는 추모일 선포까지 60년 걸렸다

바람아님 2016. 1. 29. 08:05

(출처-조선일보 2016.01.29 임지현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장)


임지현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장1월 27일은 전 세계적으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날이다. 
나치 최대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가 소련 적군(赤軍)에 의해 해방된 1945년 1월 27일을 
기념하기 위해 해방 60주년인 2005년 유엔 총회의 결의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국제추모일'을 
선포했다. 600만 유대인 희생자 중 약 100만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죽었다.

근대 문명의 파국을 선고한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지닌 세계사적 의미에 비하면 홀로코스트 추모일이 
2005년에야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다. 
1978년 미국 NBC방송의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 1993년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비극에 눈을 뜬 지 한참 후의 일이다. 
2차대전 직후 이스라엘에서조차 홀로코스트는 의도적으로 잊혔다. 
순한 양(羊)처럼 끌려가 속수무책 목숨을 잃은 유대인 희생자들의 이미지는 이스라엘 독립과 건국을 주도한 
히브리 전사(戰士)들의 영웅적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일본군위안부 기념비를 세우자는 제안을 우리 독립기념관이 거부했던 것을 상기하자. 
1960년대까지도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강제수용소 것들'이라고 불렸다. 
냉전 시기 미국의 유대인들도 '유대인=공산주의자'라는 혐의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스탈린의 반(反)유대주의가 홀로코스트를 제치고 주된 타깃이 된 이유이다.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유대 민족의 비극에서 인류의 비극으로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행보이다. 
1960년대 미국의 유대인 기억운동가들은 흑인 민권운동 및 베트남 반전(反戰)운동에 적극 참가해 노예제 및 식민주의 과거에 
대한 비판과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연결시켰다.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는 노예무역과 노예제도, 아르메니아인 학살,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르완다 대학살 등 다른 제노사이드와 연결되어 세계인의 비극이 됐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기억의 정치'에서 홀로코스트가 기준선이 된 것은 이처럼 인류의 비극이라는 
보편성과 결합한 덕분이다.

홀로코스트 국제추모일을 맞아 지난 12월 체결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외교 협약이나 그에 대한 
한국 및 세계 각지의 다양한 반응, 일본군 성노예 부정론에 대한 재판과 논쟁 등을 되짚게 된다. 
중요한 것은 홀로코스트가 그랬듯이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민족의 기억을 넘어서 트랜스내셔널한 보편적 기억으로 
만드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뉴욕의 홀로코스트 센터에서 만나고, 
유고 내전의 전범(戰犯)과 성범죄를 다룬 국제재판소의 판사들이 일본군 성노예 재판 시민법정에 참여하고, 
일본군 성노예 기억운동가들이 이슬람국가와 보코 하람의 여성 납치와 성적  착취,
국제적 여성 인신매매 문제를 같이 제기할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동아시아의 기억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 것이다.

아픔은 국경을 넘는다. 그러나 외교적 합의가 아픔을 껴안고 치유하지는 못한다. 
아픈 소리를 듣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아픔을 기억하는 것은 그 비명을 듣지 못하고 
같이 아파하지 못한 남은 자들의 몫이다. 
기억하는 일은 이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