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독재정권 때문에 시(詩)는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가 자유의 추구를 포기하거나
유보해서는 안 된다. "
청록파 시인 혜산(兮山) 박두진은 1981년 연세대 교수 정년퇴직 고별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혜산은 '청산도''해'
'오도''거미와 성좌' 등 서정시로 유명하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현실 참여적 면모도 보였다. 1970년 '오적 필화 사건'
때 김지하 시인을 옹호하는 사건감정서를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혜산은 1916년 3월10일 경기 안성 봉남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23세에 등단했고 30세 되던 해 박목월
조지훈과 공동시화집 《청록집》을 펴내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혜산 자신이 생각하는 전성기는 말년에 왔다. 그는 "70세가 되니 마음 먹은 대로 시가 좀 써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혜산은 주로 돌에 대한 시를 써 '돌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82세 때인 1998년 9월16일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13년 전 오늘 한국경제신문은 "시류에 야합하지 않은 구도자적 삶의 표상으로 존경받아왔다"며
혜산의 부고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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