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첫 달 급여를 확인한 뒤 환호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수습 기간이던 사흘치 시급이 안 들어왔다는 거다. “법에는 수습 때도 최저 시급을 주게 돼 있지 않나요? 확인 좀 해 보시면 안 될까요?” 조심스러운 추궁에 사장은 건성으로 알았다고 해놓곤 내내 묵묵부답이란다. “당연히 더 따지고 싶지. 그런데 다음 방학 때도 일하려면 밉보이지 말아야 하잖아. 법이 있으면 뭐해. 알바생들이 눈치 안 보고 받을 돈 딱딱 받게 하는 게 정치인들 할 일 아니냐고!” 실망은 분노로 번졌고, 분노의 화살을 한참이나 전방위로 쏘아댄 뒤에야 딸애는 겨우 분이 풀리는 기색이었다.
어디 알바 시급뿐일까. 교수들의 잦은 결강과 무성의한 강의 역시 청년들을 화나게 한다. 속칭 땡땡이에 이골이 난 ‘86세대’로선 격세지감을 느낄 법하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때인가. 대학 나오고도 일자리가 없어 노는 젊은이가 역대 최고인 334만 명에 이른단다. 요컨대 등록금의 ‘가성비’가 역대 최저치로 떨어진 건데, 그럼에도 부모님 등골을 빼먹든 알바를 전전하든 울며 겨자 먹기로 생돈을 꼬박꼬박 바쳐야 한다. 가뜩이나 억울한 마당에 교수들이 툭하면 휴강에다 10년 묵은 강의 노트를 곰국처럼 우려먹는다면 참을 수가 있겠나.
청년들의 분노가 들끓는 건 미국도 매한가지다. 대선 후보쯤 따 놓은 당상이라 여겼던 힐러리 클린턴의 간담을 서늘케 한 ‘샌더스 열풍’, 그 진원지가 바로 성난 젊은이들이다. 일부 부유층 자녀를 빼곤 대부분 수억원대 학자금 대출 탓에 졸업 후 10년, 20년이 지나도 빚더미에서 탈출할 희망조차 없다니 버니 샌더스가 내건 ‘공짜 등록금’ ‘최저임금 두 배’ 공약에 솔깃할 수밖에. 게다가 그 재원을 ‘미국판 금수저’라 할 1% 부자들에게 세금 폭탄을 떨어뜨려 거두겠다니 실현 가능성을 떠나 박수가 절로 나올 일 아닌가.
미국도, 한국도 휘몰아치는 분노의 기저엔 불평등이 있다. 빈익빈 부익부 추세가 갈수록 악화되는 가운데 특히 최근 30년 새 청년층 소득이 노년층을 포함한 다른 연령대보다 눈에 띄게 줄었단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마저 사라진 시대, 가난한 청년세대의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미국 억만장자 중에 불평등 해소를 앞장서 외치는 이들이 적잖은 건 그래서다. 참을 만큼 참은 ‘흙수저’들이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란 위기의식의 발로다. “요즘 같은 소득 격차는 역사적으로 볼 때 셋 중 하나의 방법으로 해소돼 왔다. 세금, 전쟁, 아니면 혁명!”(전설적 헤지펀드 매니저 폴 튜더 존스 2세)
‘샌더스발 혁명’은 불발에 그칠 테지만, 덕분에 미국 정치권은 그 어느 때보다 ‘99%’에 주목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분노라는 시대정신에 기민하게 응답하는 건 어째 영화판뿐인 듯하다. 지난해 1200만여 명을 스크린 앞에 불러모은 영화 ‘베테랑’에 이어 올 들어 1000만 관객에 육박한 ‘검사외전’까지 부와 권력을 움켜쥔 소수의 일탈을 응징하는 판박이 구조로 잇따라 흥행에 성공했다. 현실 속에선 난공불락인 이들이 영화에서나마 흠씬 두들겨 맞는 판타지를 선사한 게 비결이라나….
하지만 ‘사이다’ 같은 영화 한 편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세상을 바꾸려면 미우나 고우나 정치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엔 샌더스가 없다고? 맞다. 그럼 마냥 팔짱 낀 채 기다리고만 있을 텐가. 마침 한국도 선거의 계절이다. 잠잠하던 청년들이 총선에 맞춰 등록금과 최저임금 등 절실한 이슈를 정치권에 직접 압박하기 위한 연합체를 탄생시켰다는 소식이다. 분노가 변화를 이끌어내는, 작은 희망의 싹이라도 보고 싶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