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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Live] 한반도 남부 倭人 무덤의 정체는

바람아님 2016. 4. 7. 00:43
매일경제 2016.04.06. 20:04

지난해 11월 고흥 풍양면 야막고분을 발굴하던 나주문화재연구소는 매우 낯선 형태의 고대 무덤을 찾아냈다. 무덤 위에 돌을 깔고 봉분을 덮은 이른바 '즙석(葺石)' 방식이다.

이 연구소 권택장 학예연구사는 "3세기 후반~7세기 말 왜의 고훈(古墳)시대의 보편적 무덤"이라고 정의했다. 왜(倭)계 무덤이 왜 이곳에서 발견된 것일까. 단순한 무덤양식만 갖고 특정 형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무덤 속에서 나온 부장품도 중요한 평가요소다. 야막고분에서는 실제 왜색이 짙은 갑옷·투구와 검, 대도, 창 등 무기류가 다량 출토됐다.


▲ 해남에서 발굴된 용두리 왜계고분 <매경DB>
▲ 해남에서 발굴된 용두리 왜계고분 <매경DB>

연구소 측은 갑옷과 투구에 대해 "형식으로 미뤄 제작 시기를 5세기 전반으로 짐작할 수 있다"며 "지금까지의 출토사례를 비교하면 국내보다는 일본에서 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고 수량 또한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분석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이 같은 모양의 왜계 분묘가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다. 야막고분을 포함해 현재까지 확인된 왜계고분은 총 25기. 영산강 일대에서는 고창 칠암리, 담양 고성리·성월리, 함평 장고산·신덕·표산, 광주 월계동·쌍암동·명화동, 영암 자라봉, 해남 용두리·조산·장고산 등 6세기 초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3기가 나왔다.


전방후원분은 원형과 사각형의 분구가 붙은 형태로 고훈시대 지배계층의 전형적인 분묘 양식이다. 무덤에서 환구대도, 협갑(脇甲·갑옷) 등 일본열도산 부장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때 고급무사들이 피장자인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왜계는 같은 시기 공주 단지리·안영리, 부여 능산리 등 충청권에서도 3기가 발굴됐고 경남 고성군 송학, 의령군 경산리·운곡리, 사천시 신진리, 거제시 장목, 창녕균 송현동 등 대가야권에서도 6기가 출토됐다. 신안 배널리, 고흥 안동·야막 등 3기는 5세기 초 만들어진 묘다.


이들 무덤은 영산강 일대의 전방후원분과는 달리 단순히 무덤 표면에 돌을 쌓거나 내부에 요석(腰石)을 설치하고 붉게 채색했다. 전방후원분에 비해 피장자의 신분이 상대적으로 미천한 중·하위층 무사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5세기에는 백제가 아직 한반도 남단까지는 세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게 주류 학계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25기의 왜계무덤은 4세기 후반 일본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를 정벌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는 말인가.


그런데 정작 임나일본부설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일본 사학계는 이를 공식 폐기했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최종보고서에서 일본 측 위원들은 '고대 한일관계의 성립'과 관련해 "한반도에서 왜인의 활동 흔적은 여러 곳에서 인정되지만 왜국의 영토가 존재했다는 것과 왜국이 대대적인 군사 전개를 했다는 점은 정정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일각에서는 무덤이 발견되는 지역이 남해안과 서해안 일대 고대 연안 항로상에 위치한다는 데서 당시 항로를 통행한 교역 주체들의 흔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용병설이 보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 분야에서는 박천수 경북대 교수가 권위자이다.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243년조는 "백제 삼근왕이 사망하자 동성왕이 귀국했는데 지쿠시코쿠(筑紫國·북부 규슈계) 군사 500인이 호위했다"고 적고 있다. 475년 고구려군 공격에 백제는 21대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을 내준다. 천신만고 끝에 웅진에 터를 마련하지만 4년 만에 3명의 국왕이 바뀌는 내분까지 겹치면서 백제의 통치기구는 사실상 와해된다.


일본에 머물던 동성왕(479~501년)은 휘하 무사단을 이끌고 급거 귀국해 백제 24대 왕에 오른다. 왕은 용병(傭兵)을 적극 끌어들여 백제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이후 500인의 무사단은 어떻게 됐을까. 문헌에서는 그들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왜인 용병은 비단 500명뿐이었을까.


동성왕이 혼란을 수습하는 방편으로 선택한 것은 남으로의 영토 확장이었다. 그는 13대 근초고왕(346~375년) 이래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영산강 방면을 백제 영토에 편입하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는데 이 일을 용병에게 맡긴다. 박 교수는 "'왕이 무진주(武珍州·광주로 추정)를 순행했다'는 삼국사기 동성왕 20년조(498년) 기록은 지방관들이 중앙의 통제를 받았던 사실을 잘 증명한다"고 했다.


왜계 무덤에서 금제 귀고리, 목관·제기 등 백제 왕실에서 하사한 다량의 위신재(威信財)가 나온 것도 이들이 백제 예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인 용병의 상당수는 백제인화했을 것이다. 함평 신덕리 고분은 그들의 귀화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다. 신덕 1호분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이지만, 바로 옆 2호분(아들 묘로 추정)은 백제의 능산리식 횡혈석실로 조성됐다. 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난 일본의 무덤양식을 채택한 반면 백제가 고향인 그 아들은 백제식을 따르지 않았을까.


전방후원분이 유독 6세기 초에만 한정되는 것도 특이하다. 538년 사비(부여) 천도 후 한반도 남부가 백제의 강력한 지배권에 들게 되면서 용병의 도움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됐음을 의미한다. 일본 사학계는 오랜기간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한 임나일본부가 4세기부터 발전해 6세기에 소멸된다고 주장해 왔다. 박천수 교수는 "정치 중심 세력화를 뜻하는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한 점도 왜인용병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라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주, 부여 왜계묘의 피장자는 고구려 방어를 위한 용병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서부 경남지역의 무덤들은 대가야계 왜인 용병으로 판단된다. 대가야는 6세기 초 서부경남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추측된다. 5세기 초 신안과 고흥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가 해로를 통해 여수반도와 하동지역을 공략할 때 동원된 왜인으로 해석된다.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