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제 마지막 수도 부여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上)]
그 마지막 날 풍경
찬바람이 부는 음력 8월 2일, 백제 수도 사비성 왕궁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서기 660년이었다. 대청마루 위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앉아 있었다. 마루 아래 땅바닥에는 백제 의자왕이 앉아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백제로 망명한 신라 장수 검일(黔日)이 포박된 채 앉아 있었다. 18년 전인 642년 7월 검일은 백제군에 포위된 대야성(大耶城)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검일은 성주인 김품일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한(恨) 풀이를 벼르던 사내였다. 그 전투에서 성주 김품일과 고타소랑(古陀炤娘) 부부가 죽었다. 고타소랑은 태종의 딸이고 김품석은 사위였다. 18년이 흘렀다.
태종이 말했다. "너는 죄가 세 가지다. 창고를 불질러 성 안에 식량이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고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며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한 죄." 신라 병사들은 검일의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묶어 찢어버리고 백마강에 던졌다. 백제 왕국 678년 역사도 끝났다. 7월 9일 금강 하구 기벌포에 상륙한 당나라 부대와 같은 날 황산벌에서 계백 부대와 맞붙은 김유신 부대가 사비성에 진군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토박이 학자가 바라본 백제
"생각할 수록 애잔한 역사"
고고학자 심상육과 궁남지(宮南池)
부여군립 백제고도문화재단 책임연구원 심상육은 1973년생이다. 백마강 지류인 왕포천 건너 장암면 정안리가 고향이다. 마을 주변에는 백제 시대 가마터가 있었고 선산에는 고분이 널려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배를 타고 강 건너 읍내로 소풍을 갔다. 옛 절터인 군수리사지에 오르면 궁남지(宮南池)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역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어찌 하다 보니 고고학자가 되었다"고 그가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서기 634년 3월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성 남쪽에 20리 물길을 내 못을 만들고 버드나무를 심고 한가운데에 섬을 만들었다. 4년 뒤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大池)에 배를 띄웠다"고 돼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서동이고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다. 두 나라가 피터지게 싸우는 와중에 벌인 사랑이라, 궁남지는 연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됐다. 부여를 상징하는 캐릭터도 서동과 선화공주요, 궁남지가 있는 곳 이름도 서동공원이다.
하지만 '궁 남쪽 연못'이라는 기록만 있을 뿐, 이 연못이 궁남지라는 다른 근거는 없다. 부여에서 나고 자란 70대 김요한-원한 자매는 "지금처럼 정비돼 있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에도 궁남지 못가에서 놀았다"고 회상한다. 밤이면 연못가 버드나무 밑동에 조명이 켜지고, 작은 섬 위에 있는 정자도 불을 밝힌다.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백제가 망했다. 평화를 그리워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망했다.
유아독존이었던 백제,
나당 연합군에게
한 달 만에 멸망
7세기, 멸망으로 가는 나날들
백제를 둘러싼 7세기 동아시아 역사는 복잡하다. 시대순으로 짤막하게 언급을 해본다. 641년 의자왕이 즉위했다. 642년 의자왕이 신라 깊숙이 쳐들어가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백제 사령관 윤충은 김춘추의 딸과 사위 목을 잘라갔다. 88년 전인 554년 관산성에서 성왕 목을 잘라간 신라에 대한 복수였다. 648년 딸을 잃은 김춘추가 나당연합을 제안하러 당나라로 떠났다. 그해 김유신이 옥문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야성 성주 김품석 부부 유해와 생포한 백제 장수 8명을 맞교환했다. 651년 당나라는 두 차례 벌인 고구려 공격에 실패하면서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하라고 요구했다. 백제는 이를 무시하고 655년 고구려, 말갈 연합군과 함께 신라 북쪽을 공격했다. 세상은 합종연횡이 한창인데, 백제는 유아독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655년 이후 백제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붉은색 말이 한 절 대웅전에 들어가 죽었다. 659년 2월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했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백제는 망한다"고 울었다. 대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의자왕은 개의치 않았다. 승리감에 취해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했고 왕궁 남쪽에 큰 정자를 세웠다. 왕비와 비, 궁녀들과 함께 술을 즐기며 충신들을 멀리했다. 이미 648년 김춘추가 맺은 나당동맹이 차근차근 진행돼 659년에는 백제를 칠 준비가 완료돼 있는 상태였다. <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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