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박종인의 땅의 歷史] 알아갈수록 애잔함이 드러나는 백제의 역사

바람아님 2016. 4. 16. 00:36
조선일보 : 2016.04.14 16:48

[벡제 마지막 수도 부여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下)]
 

<上편에서 계속>

부소산성 삼충사와 의자왕

고고학자 심상육이 말했다. "백제사는 기록도 많지 않은 데다 그나마 있던 유물과 기록도 사비성이 약탈되면서 망국과 함께 사라졌다. 발굴되는 기와에는 음양각으로 도장이 찍혀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도 수수께끼다." 심상육은 "그래서 백제사는 알수록 애잔하다"고 했다. 기록이 드문 이유가 망국에 따른 철저한 유린과 약탈이라서 더 그렇다고 했다. "나는 부여 사람으로서, 고고학자로서, 부여 사적을 발굴하는 혜택을 받고 산다." 그의 말에도 애잔함이 배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의자왕의 총기 변하자
백제는 亡國의 길을 걸어가

해동증자로 존경받던 의자왕은 말년에 승리감에 도취해 충신들을 버렸다. 삼국사기는 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했다"고 평가했다. 주색에 빠져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656년 좌평 성충이 "정신차리시라"고 극간(極諫·목숨을 걸고 아뢰는 일)했다가 옥에 갇혔다. 성충은 "기벌포와 탄현을 지키시라"고 유언하고서는 "백제 망하는 꼴 안 본다"며 단식하다 죽었다. 660년 바른소리하다가 유배를 당했던 또 다른 충신 흥수도 같은 취지로 조언을 했다. "듣지 마시라"는 간신들 말에 왕이 혹하던 그 순간 나당연합군은 기벌포와 탄현을 장악하고 사비성으로 진군 중이었다. 계백이 탄현으로 나가 신라군에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오천 결사대도 목숨을 걸었지만 5만 신라군도 목숨을 걸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고 새긴 정림사지 오층석탑.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신라 성왕의 복수를
백제 멸망으로 완성

신라군은 승리가 아니라 백제 멸망이 목표였다. 아무리 피해가 극심해도 무조건 최단 시간에 당나라 군사와 만나 사비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진군 거리는 하루 20㎞로, 6·25전쟁 때 인민군이 남진하는 속도와 비슷했다. 불과 한 달 만에 13만 당나라 대군과 5만 신라군에 백제는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백제를 지켰던 세 충신은 부소산성 삼충사 사당에 모셔져 있다.


100년 이어진 가문의 복수

의자왕은 옛 수도인 웅진(공주) 공산성으로 후퇴해 농성전을 노렸지만 성에 들어간 지 닷새 만에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다. 백성들 피해를 우려한 배려였다는 말도 있고 웅진 장수 예식(禮寔)이 왕을 강제 투항시켰다는 말도 있다. 먼저 투항한 왕자 융(隆)에게 신라 태자 법민(法敏)이 침을 뱉으며 쏘아붙였다. "네 아비가 내 누이동생을 부당하게 죽여 감옥 안에 묻었다. 나는 20년 동안이나 마음이 아팠고 머리를 앓았다." 크게는 국가들이 벌인 전쟁이요 작게는 개인적인 복수심이 만든 전쟁이었다. 대야성 전투는 88년 전 할아버지 성왕이 참수당한 데 대한 복수였다. 대야성 성주가 저지른 패륜은 한 사내를 한(恨)을 품게 만들었다. 그 분노가 끝없이 증폭돼 20년 뒤 나라 하나를 치욕스럽고 급작스러운 멸망으로 이끌게 된 것이다.


2016년 사비성, 부여

당나라 병사들은 사비성을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다. 소정방은 도성 한가운데에 있는 오층석탑에 '대당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글을 새겨넣었다. 오랜 기간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리던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개명됐다.

낙화암 길목에 있는 소나무 연리지(連理枝). 한 뿌리에서 나와 갈라졌다가 다시 만났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700년의 화려했던 역사,
오늘날 흔적으로만 남아

왕궁이 있었던 관북리 왕궁터는 폐허가 됐다. 삼천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궁터 북쪽 부소산 낙화암은 그대로다. 당시 사비성 인구가 5만이었으니 궁녀가 3000명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다. 낙화암 가는 길목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두 팔을 붙이고 서 있다. 밑동에서 갈라졌다가 윗동에서 다시 해후한 기이한 나무다. 백제를 닮았다. 나당연합군이 진격한 사비도성 성곽은 발굴이 한창이다. 이 모든 곳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가장 찬란했고 가장 허망한 나날이 공존하는 유적들이다. 모두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993년 12월 12일 사비성 동쪽에 있는 능산리 계곡 주차장 공사 도중 진흙 물구덩이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다. 발굴팀은 "당나라 군대의 방화와 약탈을 피해 승려들이 황급히 숨겨두고 도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궁남지도 깔끔하게 정비됐다. 아무도 모른다. 제대로 된 발굴 작업 없이 정비된 이 연못이 과연 무왕과 선화공주가 노닐었다는 그 연못인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이 말했다. "나는 이곳을 궁남지로 알고 소풍을 다녔고, 어른이 되어서는 궁남지에서 사랑을 만났다. 이곳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다. 우리는 궁남지로 추정한다."


의자왕은 항복 한 달 뒤 네 왕자와 귀족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 두 달 만에 낙양에 도착한 의자왕은 며칠 뒤 죽어 북망산에 묻혔다. 2000년 부여군은 낙양시로부터 왕자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과 북망산 흙을 기증받아 능산리에 가묘를 만들었다. 가장 찬란한 시절, 가장 드라마틱하게 생을 마감한 사내가 귀향했다. 1340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