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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불안의 시대, 꽃잎보다 안타까운 우리들의 생

바람아님 2016. 4. 11. 00:23
한국일보 2016.04.10. 12:40

봄바람이 세차다. 꽃잎들이 우르르 땅바닥을 휩쓴다. 그러나 초봄에만 볼 수 있는 그 광경에 눈길은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한다. 마음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모니터로 다시 눈을 돌리라 한다. 아무래도 마음 속에 똬리 튼 불안 때문인 듯하다.

기업, 대학, 연구소 어디건 가리지 않고 구조조정은 상시화되었고, 선거를 앞두고 잠시 잊혔지만, 이른바 저성과자 해고는 눈 앞에 다가오고 있다.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영위하는 사람은 누구건 어디에 있건 간에, 자신이 저성과자인지, 구조조정 대상인지 여부를 돌아보게 된다. 그 알량하고 협소한 성과 측정의 잣대를 비판하든 비판하지 않든, 한 번쯤은 아니 여러 번 그 잣대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춰 본다. 의식적으로 거부해 보려 해도 성과주의는 부지불식간에 마음 속에 스며든다. 나의 노동은 그렇게 좁게 측정되는 성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온전한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 보지만 왠지 공허하다. 생계라는 것이 어디 그리 가볍게 치부될 수 있는 것인가. 이렇게 불안은 내면화되고 있다.


불안정한 노동세계에 있는 우리를 뒷받침하는 사회안전망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우리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사건들,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 질병, 산업재해와 직업병, 출산과 양육, 노령 이 모든 것에 대해 사회적 책임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사회보장제도들이 있지만 절반 가까운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회보험에 제대로 가입조차 하지 못한 형편이다. 실업자의 절반 이상은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다. 이것이 지금 한국 복지국가의 맨얼굴이다. 우리 사회에서 고용에 대한 사용자 책임, 나아가 사회보장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길은 지나치게 넓게 열려있다.


그 결과 지난 10여년 동안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이 도입됐지만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율은 올라갔고, 다른 나라에서 자살률이 떨어질 때 우리나라에서는 반대로 자살률이 올라갔다. 해고당한 노동자가, 가난과 질병으로 고립된 사람들이 죽어갔다. 소중한 목숨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쌍용차 해고자들의 죽음, 삼성전자서비스노조원의 죽음,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한진중공업 노조원, 유성기업 노조원의 죽음…. 이런 수많은 죽음은 감시, 탄압, 해고, 생활고로 가해한 사회적 타살에 다름 아니었다. 복지라는 것이 사회연대를 통한 서로에 대한 돌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복지국가 성장이 이런 일들을 막는 데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뼈아픈 반성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노동과 복지가 모두 불안정하여 사회가 시민들의 삶을 보장하지 못할 때, 사회가 침몰하는 배에서 우리를 건져주지 못할 때, 생존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된다. 공동체의 보호기능이 취약해진 상태에서 각자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서로를 돌보는 것은 물론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죽음을 그저 기억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 된다.


잠시 멈췄던 노동법 개혁은 선거가 끝난 후, 다시 궤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기착취의 시대가 전면화될 예감이다. 공약들만 보면 연금, 보건의료, 사회서비스 등 다양한 복지입법 논쟁이 재개될 것 같다. 비인간적인 사회를 더욱 그렇게 만들 것인가에 관해 지금 선거가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선거 이후 맞서 싸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질 것 같다. 선거 이후를 준비하는 것, 국회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안한 내면과 자기착취의 생을 벗어나기 위해, 기억할 권리를 위해, 삶의 가능성을 피워내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투표 이외에 또 다른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바람에 휩쓸려 길 위를 도는 꽃잎들 속에서 우리들의 파편을 본다. 우리 시대 서로의 불안과 고통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함께 모색하고,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