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태평로] 치욕의 전당으로 가는 길

바람아님 2016. 4. 22. 07:00

(출처-조선일보2016.04.22 김동석 스포츠부장)


김동석 스포츠부장케냐 출신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 에루페의 한국인 특별 귀화 시도는 우리 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 
2시간 5분 13초의 풀코스 개인 최고 기록을 가진 그는 8월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 기근에 시달리는 
한국 육상계가 탐낼 만한 인물이었다. "왜 하필 흑인 선수가 다른 종목도 아닌 (상징성이 큰) 마라톤 
국가대표냐"고 정서적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육상계는 "인종은 문제가 아니다. 
다른 종목 귀화 선수와의 형평성을 봐서라도 허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달 초 대한체육회 심사 과정을 보면 논의는 철저하게 그의 약물 전력 문제로 국한됐다. 
피부색·종목 상징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말라리아 치료용 약물'만 아니었으면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흑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을 것이다. 
약물 파동을 겪었던 수영 박태환의 경우도 비슷한 결론이었다. 
한국 수영의 수퍼스타인 그에게 관용을 베풀자는 의견이 있었고, 체육계도 한때 구제를 검토한 것이 사실이다. 
박태환도 벽을 넘지 못했다. 최소한 약물에 관해 한국은 이번에 원칙을 확립하는 성과를 거뒀다.

선수들은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한국은 예외와 온정주의가 만연한 곳인데 왜 우리에게만 이렇게 혹독하게 구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백보 양보해 본인들 말대로 약물은 치료용이었거나 자신도 모르게 투약됐을 수도 있다. 
설사 그런 경우라고 해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약물에 대한 무관용주의다. 
국제 체육기구들이 약물에 가혹한 건 무관용주의가 스포츠의 정의를 지키는 최후 방어선이기 때문이다.

국가 주도 도핑 의혹을 받고 있는 러시아 육상은 올림픽 사상 유례가 없는 국가 전체 출전 금지 징계를 앞두고 있다. 
출전 금지된 러시아 선수 명단이 4027명이다. 그중에는 약물 양성반응이 없었던 여자 장대높이뛰기 스타 옐레나 
이신바예바도 포함돼 있다. 이신바예바는 "왜 나처럼 결백한 사람까지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분개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육상경기연맹은 러시아 육상 전체가 도핑 의심을 받는 만큼, 전원 출전 금지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 관계자는 "적발된 선수들은 상당수가 법률 전문가 조언까지 받아가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무관용주의가 한번 무너지면 누군 처벌하고 누군 용서할 건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 올림픽 때도 큰 부정행위를 저지른 선수는 벌금과 태형, 추방형의 이중 삼중 처벌을 받았다. 
부정행위자로부터 징수한 벌금으로 제우스 신의 청동상을 세웠고, 
신상(神像)을 받치는 석조 좌대에는 부정행위자와 가족의 이름을 함께 새겨 온 세상에 알렸다. 
지금도 그리스 올림피아 스타디움 유적지로 가는 길에는 이들의 오명을 새긴 석조 좌대 16개가 남아 있다. 
2000년 넘게 '치욕의 전당'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스포츠맨은 평생 명예의 전당 헌액을 위해 애쓰고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약물은 들키지만 않으면 명예의 전당으로 가는 직행 티켓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티켓의 최종 행선지는 치욕의 전당이다. 선수들은 파멸을 향해 가게 돼 있다.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와 코칭 스태프 모두 이번 결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