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터치! 코리아] '어쩔 수 없다'는 일본, '어쩔 수 있다'는 한국

바람아님 2016. 4. 24. 00:36
조선일보 : 2016.04.23 03:00

끔찍한 자연 재해 만나도 '평정심' 유지하는 일본인… 地變이 만든 '현실적 유물론'
人災 많은 한국은 정반대 "네 탓이니 살려내라"
사회적 피로도 높아지지만 이것도 '활력' 상징 아닐까

박은주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박은주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또 엄청난 소식이 들려왔다. 지진, 그 이후 이야기다. '가족 8명이 죽 두 그릇을 받아가고도 더 달라고 줄 선 사람이 없었다. 한 이재민은 "이 정도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급수대 앞에 줄이 엉키자 서로 먼저 받으라며 양보한다. 어느 하나 앞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 쑥대밭 속에서도 누구를 원망하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교양 있는 한 개인이 속절없는 재난이나 사고 앞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열 명, 백 명이 넘는 집단이 어떤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대처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관찰한 와세다대학의 외국인 교수는 "부처의 태도에 비견된다"고 했는데, 그 부처 모습은 이번에도 그대로다. 이건 미담이 아니라 '신화' 수준이다. 부러운 일이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란 이런 것. 다른 선진국 사람들도 일본인 태도는 놀랍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저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일본은 지진판 위에 세워진 나라다. 일본 역사와 함께 시작된 지진·해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판단을 후세에게 귓속말로 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일본 연구자는 일본에서 불교와 신도(神道)가 융합하고, 종교적 권위 대신 칼 든 무인에게 압도당한 일본 봉건제 이후 역사를 근거로 내세(來世)보다 '현세''현재'를 중시하는 관점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 많은 신사(神社)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다. 원망은 허무한 일.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 일본인은 어쩌면 환경이 만든 유물론자들이다. 평판·화합이 중요하고, 민폐자는 공동체에서 배척된다. '품격 있는 희생자'의 뿌리엔 수용, 포기, 허무주의도 섞여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이런 말이 나온다. "허무주의고 뭐고 다 좋으니 악다구니 쓰는 것 좀 덜 봤으면 좋겠다." 우리 현실과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기 시작하면서 나오는 말이다. 재난의 현장은 언제나 고성이 오간다. 혹여 정부의 책임이 있을 수 있다면 "정권 물러가라" 구호가 바로 나온다.

어떤 죄인지 누구 죄인지 밝히기도 전 "죄인의 목을 빨리 치라"는 주문이 나온다. 그러니 밝혀지는 것도 적고, 개선은 더 어렵다.

우리의 속성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살려내라"는 말은 묘하다. "살려 달라"는 급할 때 어느 문화권에서나 쉽게 나오는 말이지만, 누굴 향해 "살려내라"고 말하는 문화권은 많지 않다. 이 땅에 일어난 재난 대부분이 '천재지변'이기보다는 '인재(人災)'인 탓도 크고, 이런 태도가 공동체에 무례한 일이라는 생각도 우리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개 현상이란 2차원 평면이 아니라 3차원 입체다. 양면성이 존재한다. 신중하면 활력이 없고, 박력이 있으면 혼란스럽다.

일본을 아는 사람들은 일본은 여전히 대단하지만, 국가 활력(다이내믹스)은 우리나라에 못 미친다고들 한다. 일본인들이 자민당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자민당을 그렇게 압도적으로 밀어주는 것도 '집단적 무기력' '집단적 대세 인정'의 한 상징이라 한다. 거역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듯.

압도적 자연재해의 기억이 거의 없는 한국은 사람이 하는 일은 다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일본 기자는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일본인이 자민당 체제를 인정하듯 한국서도 그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고 했다. 한국인은 마음속에 지진을 일으켜 '콘크리트 지지'에 아예 활성단층을 만들어냈다.

한국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없다. 불가역(不可逆)은 없다. 어쩔 수 없는 건 없다. 그게 억지와 소란을 만들고, 때로는 예측 못 한 변화를 만든다. 현실이 마음에 달렸다고 하는 소박한 관념론자이자, '하면 된다' 박정희 정신의 후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