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4.25 장병원·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나는 마감의 제왕이었다.
이전 직장인 영화잡지사에서 9년간 기자 생활을 했는데, 기자 일로 업(業)을 삼는 동안
마감 시간을 어긴 경우는 손에 꼽는다.
선배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기자는 마감 사수가 생명"이라는 충고를 들은 탓이다.
마감 시간을 지키는 일이 기자의 '전문성'을 측정하는 척도라는 관념이 생긴 것이다. 마감 전에
기사 작성을 마친 뒤 자리를 뜨는 나에게 동료, 후배 기자들은 '작성완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가로 인정받으면 편해진다.
운신이 자유로워질 뿐 아니라 정석을 초월한 파격도 가능해진다.
설령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예외적인 경우 또는 전문가의 여유로 받아들여진다.
'작성완료' 기자로 공인받은 후부터 나는 편집장으로부터 마감을 재촉받지 않았다.
취재의 방향이나 기사의 세부에 대해 조언은 있었지만, 언제까지 마감을 하라는 채근은 없었다.
'과연 그토록 시간 엄수에 철저했는가?'를 자문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가끔은 전날 들이부은 술 때문에 시간을 넘기거나 농땡이를 피우고 마감을 미루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편집장은 으레 "저 친구는 기사 작성을 마치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라고 여기고
상습적인 마감 지체자들만 닦달하곤 했다.
인간의 판단 체계는 놀라우리만치 피상적이어서 일단 전문가라는 딱지가 붙게 되면 그의 진의(眞意)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아랫사람의 신망이 두터운 상사의 훈계는 효과 만점이다.
심지어 그가 부부 싸움 뒤에 분노를 쏟아내더라도 직원들은 경건하게 받아들인다.
오죽하면 저 자애로운 선배가 성을 내겠는가 싶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것이다.
전문 술꾼으로 인정받은 사람에겐 술을 강권하지 않는다.
어련히 잘 마시고 있을 것으로 여기고 굳이 대작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즉, 무엇이든 전문가로 인정받을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의 아마추어적인 과오나 게으름, 만용도 전문가의 실수로 가뿐히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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