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軍事·武器

[Why] [박근 前 유엔 대사 인터뷰] "10년前 '한국 核무장' 제기… 그땐 미친 사람 취급"

바람아님 2016. 5. 1. 20:38

(출처-조선일보 2016.04.30 권순완 기자)

박근 前 유엔 대사 인터뷰

"처음엔 전략적 공갈"
2006년 북한 첫 核실험 "核 확산 염려한 중국이 북한 제재할 것이라 예상"

시간 지나면서 眞心으로
미온적인 중국 태도에 核폐기 가망 없어 보였고 美 核우산도 작동 어려워

核무장론자가 된 이유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核 불균형 때문에 北 국지 도발에 속수무책"

'한국 핵무장론'을 두고 '북핵에 대항하기 위한 정당한 자구책(自救策)'이란 옹호론이 있는 반면 '안보 포퓰리즘'이란 
반대론도 거세다. 핵무장론을 선도하고 있는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최근 한 칼럼에서 이 문제가 미국 대선에서 논의되는 
것을 두고 "박근 전 유엔 대사가 한국 핵무장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지 10년 만에 핵무장론이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됐다"고 
평가했다.
박근 전 대사는 “한국이 핵무장을 하게 되면 남북 간 경성권력(hard power) 경쟁은 무승부가 된다”며 “연성권력(soft power) 경쟁에서 자유·인권·민주 등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는 한국이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 전 대사는 “한국이 핵무장을 하게 되면 남북 간 경성권력(hard power) 경쟁은 무승부가 된다”며 “연성권력(soft power) 경쟁에서 
자유·인권·민주 등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는 한국이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김지호 기자
지난 20일 오전 서울 사직동 한·미우호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근(89) 전 대사는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다. 
대사를 다섯 번(스위스·태국·벨기에·제네바·유엔) 지낸 그의 외교관 경력은 만 30년이었다. 
그가 처음 한국 핵무장을 주장한 것은 2006년 10월 19일이었다. 북한이 함경북도 풍계리에서 첫 핵실험을 감행하고 
열흘 지나서였다. 그는 한·미안보연구회의 초청으로 서울 장충동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기조 연설자로 나서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했으므로 한국도 핵무장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안보연구회는 존 틸레리 전 한미연합사령관이 공동 회장으로 있는 단체였습니다. 
고위 외교관 출신이 '핵개발을 하자'고 하니까 술렁거리더군요. 제가 말을 마치자마자 주한 미국 대사관의 무관(武官)이나 
주한미군 관계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는 게 보였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연설자로 초청되는 일이 뜸해졌어요."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진의는 핵무장 자체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핵무장론이 나오면 북한의 맏형 격인 중국이 한국·일본·대만 등의 '도미노 핵 확산'을 염려해 북한을 엄격하게 
제재할 것이라 예상했다. 일종의 전략적 공갈(恐喝)이었다. 전략이었기 때문에 그 의도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한동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며 "내 속뜻을 파악해 사적으로라도 동조해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웠다"고 말했다.

그해 월간조선 12월호엔 박 전 대사의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은 NPT(핵확산금지조약)을 적법하게 탈퇴할 수 있다. 한국이 핵을 가지면 북핵의 가치는 영(零)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엔 전략이었던 것이 점점 진심이 됐다"고 말했다. 북한 핵실험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너무 
미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을 이용해 핵 폐기를 달성하는 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워싱턴이 핵을 맞는 위험 앞에선 미국의 핵우산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봤다.

그는 외교부에서 미주과장과 미국 공사를 지냈다. 지금은 사단법인 한·미우호협회의 명예회장이다. 
"핵을 개발하면 미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미국은 총력을 다해 저지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 미군 철수론으로 
위협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꼼짝 못하는 게 있습니다. 여론(與論)이죠. 
한국 국민 70~80%가 핵개발에 찬성하고 시청 앞에 수십만명이 운집해 '핵무장'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걸 상상해 보세요. 
동맹국 국민이 압도적으로 원하는 사안에 대해 미국이 큰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외교부는 못이긴 척 국론에 따르는 '제스처'만 취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전술핵의 한반도 재배치를 핵무장의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그것이야말로 북핵을 정당화시켜 줄 것"이라고 일축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핵개발 이유가 미 제국주의의 
핵전쟁 위협인데, 미국의 핵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그걸 사후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학자 출신 외교관이다. 
6·25전쟁 중이던 1953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외국 장교의 도움으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 진학했다. 
미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고 강사로 일하다 양유찬 당시 주미 대사가 "왜 당신 같은 사람이 귀국하지 
않느냐"며 권유해 외교부에서 일하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배려로 6개월 만에 1등 서기관으로 승진하는 특전을 누렸다.

그는 스스로를 "좀 소심하고 허약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고 진주사범학교를 다닐 땐 천황을 
숭배하라고 윽박지르는 일본인 교사 때문에 신경 쇠약에 걸려 학교를 1년 휴학하기도 했다. 
다한증까지 있어 외교부 시절 상관 앞에 서면 식은땀으로 몸이 흠뻑 젖기도 했다. 
그런 그였지만 북한의 무력 도발에는 담대했다. 
1987년 KAL기 테러 때 유엔 대사였던 그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북한 대사에게 "몽상에서 깨라(Wake up from the fantasy)"고 일갈했다. 
핵무장론자가 된 이유도 "핵 불균형 때문에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 국지 도발을 당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외자 이름인 '근(槿)'은 무궁화라는 뜻이다. 
2009년 출판된 그의 영문 회고록 제목 '히비스커스(Hibiscus)'도 같은 의미다. 그는 회고록에 썼다. 
'정부(政府)는 왔다가도 또 가는 것이지만 국가는 그 자리에 계속 있다. 
외교관은 국가처럼 한 자리에 버티어 서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