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6.05.05 03:00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5] 군현제로 본 한사군
동서남북 정벌 후 동일한 행정… 漢字·한나라 문화 확산 계기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군현(郡縣)을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이런 지배에 대해 토착민이 저항한 결과 기원전 82년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이 요동으로 후퇴했으며, 서기 313년에는 마침내 낙랑군이 멸망했다.
군현제란 황제가 직접 임명한 지방관이 군현에 파견돼 중앙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앙집권체제이다. 황제로부터 분봉(分封)받은 영역을 제후가 통치하는 봉건제가 간접지배 방식인 것과는 정반대이다. 한나라 무제는 북쪽으로는 흉노를 내쫓고, 남쪽으로는 남월(南越)을 멸망시켰으며, 서쪽으로는 서남이(西南夷)를 정복하고, 동쪽으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모든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 이렇게 말과 풍습이 크게 다른 광대한 지역을 일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제도와 율령을 적용하였고 모든 행정은 문서에 의해 처리되었다. 그리고 이런 통치의 기초 작업은 지배와 수취(收取)의 대상인 호구(戶口)를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군현제란 황제가 직접 임명한 지방관이 군현에 파견돼 중앙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앙집권체제이다. 황제로부터 분봉(分封)받은 영역을 제후가 통치하는 봉건제가 간접지배 방식인 것과는 정반대이다. 한나라 무제는 북쪽으로는 흉노를 내쫓고, 남쪽으로는 남월(南越)을 멸망시켰으며, 서쪽으로는 서남이(西南夷)를 정복하고, 동쪽으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모든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 이렇게 말과 풍습이 크게 다른 광대한 지역을 일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제도와 율령을 적용하였고 모든 행정은 문서에 의해 처리되었다. 그리고 이런 통치의 기초 작업은 지배와 수취(收取)의 대상인 호구(戶口)를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군현 지배의 기본적 속성이 낙랑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1990년 평양시 정백동 364호분에서 발견된 낙랑군 호구 장부이다. 여기에는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호구 수를 현별로 집계한 뒤 전년도 대비 증감을 표기하였다. 이 장부는 향(鄕)에서 문서로 작성되어 현(縣)에 보고된 뒤 다시 군(郡)에서 집계된 것이다. 한나라 내지(內地) 곳곳에서도 향·현·군의 단계별로 호구수를 집계한 장부가 발견됐다. 또 낙랑군처럼 변경 지역인 돈황 등지에서 발견된 목간은 군현에서 호적을 작성하고 이를 근거로 세금과 요역을 징발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 지역도 기본적으로 내지와 동일한 행정과 지배가 시행된 것이다. 바로 이런 강압적 지배와 수취가 변경 토착민의 저항과 이탈을 가져왔다.
이와 동시에 낙랑군에 편입된 토착민들은 한나라의 문화와 접촉하고 이를 수용했다. 군현의 문서행정이란 엄청난 양의 문서가 작성되고 다른 행정부서로 전달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이를 담당한 많은 토착민은 자연스럽게 한자를 습득하였고, 이를 기초로 여러 지식과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낙랑군 호구 장부와 함께 발견된 '논어'가 이를 증명한다.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현한 이두(吏讀) 역시 오랜 기간 동안 한자문화에 접촉하면서 생성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낙랑군에 편입된 토착민들은 한나라의 문화와 접촉하고 이를 수용했다. 군현의 문서행정이란 엄청난 양의 문서가 작성되고 다른 행정부서로 전달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이를 담당한 많은 토착민은 자연스럽게 한자를 습득하였고, 이를 기초로 여러 지식과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낙랑군 호구 장부와 함께 발견된 '논어'가 이를 증명한다.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현한 이두(吏讀) 역시 오랜 기간 동안 한자문화에 접촉하면서 생성될 수 있었다.
한사군이 설치된 지역 전체가 한나라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다. 낙랑군 호구 장부에 기록된 25개 현 중에는 호수(戶數)가 몇백 호에 불과한 것이 많다. 한나라의 내지에는 현의 규모가 1만 호(戶) 정도였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렇다고 원래 낙랑군 지역에 인구가 적었던 것도 아니다. 기원전 128년에 예맥의 수령인 남려(南閭)가 28만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한나라가 군현을 설치하고 호적에 편입한 토착민이 전체 거주민의 일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나라 군현에 귀속된 사람들은 성으로 둘러싸인 몇몇 도시와 취락에 거주하였던 반면 그 바깥 공간에는 한나라에 저항하며 편입을 거부한 다수의 토착민이 있었다. 한나라 입장에서는 군현이 설치된 지역을 모두 자기 영역으로 인식했겠지만 토착민 입장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땅인 곳에 한나라 사람이 들어와 거점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다.
공동기획 : 한국고대사학회
김병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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