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건 수임에 100억원. 법조계로 갔으면 떼돈 벌 것을 왜 다른 길을 택했는지 탄식할 만도 하다.
최유정 변호사 비리를 보면서 일반 독자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말로 다 못한다.
자식이라도 한 번 대성시켜 한을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무죄 변론을 빙자한 과다 수임료 수수, 인맥 동원 전방위 로비가 죄목인데
남편을 자처하는 브로커 이모씨는 돈을 갖고 잠적했다. 스릴러 드라마다.
‘부정청탁과 금품 수수 금지’를 겨냥한 김영란법, 좀 늦긴 했지만 대쪽 공직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적 합의에 정부가 응답했다.
2명만 건너면 곧 연(緣)이 닿는 고밀도 연고사회인 한국에서 대형 비리와 부정은 주로 권력집단에서 발생한다.
권력형 갑(甲)질은 정치권과 고위 공직자가 즐기는 지대추구행위고
경제·문화자본을 독점한 엘리트집단의 권력형 커넥션은 어디서나 번성한다.
학연·지연·혈연에 직연(職緣)까지 얽혀 마치 무성한 줄기세포처럼 자라난 권력집단의 네트워크에
한국 사회는 완전 포박돼 있다.
정권마다 터지는 각종 게이트가 다 그렇다.
세종증권 매각 과정에서 드러난 ‘박연차 게이트’, 수사망에 오른 홍만표 당시 중수부 검사가 칼을 휘둘렀다.
이상득 의원은 정경 유착의 전형인 저축은행 비리로 구속됐고 그 밖에 주가 조작, 조세 도피,
투자금 사기로 얼룩진 비리 메뉴는 끝이 없다. 모두 권력집단이 만든 범죄다.
세계 어느 나라도 3대 사회적 희소자원인 권력·재산·위신을 모두 동원해 연합함대를 꾸리면 당할 자가 없는데
세계 어느 나라도 3대 사회적 희소자원인 권력·재산·위신을 모두 동원해 연합함대를 꾸리면 당할 자가 없는데
한국에서 특히 그렇다. 방산 비리는 인허가권을 행사하는 고위 공직자와 퇴역 장성, 군속들의 합작품이고
백화점과 입점업체 간 숨은 고리, 대자본과 체인점 간 착취 고리, 대기업과 하청업체 간 주종관계는 널리 알려진
한국형 모순이다.
부정청탁과 비리의 핵심 진앙지는 5대 권력집단인 정치·관료·경제·문화·지식계 각 영역의 ‘상층부’끼리 맺는 권력 카르텔이다.
그런데 ‘비리 제로 사회’를 겨냥한 김영란법은 무소불위의 상층부 권력 카르텔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을까?
김영란법은 이걸 비켜 갔다. 대신 상층부 바로 밑에 위치한 중산층, 그것도 일부 전문 교양시민층을 주요 표적으로 삼는
한계가 있다.
윗물은 그대로 둔 채 아랫물을 정화하는 격이다.
김영란법은 적용 대상을 공무원·교사·교수·언론인으로 한정했는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정치권은 빠지고 세 직종이 부가된 변종이다.
공직사회 내부에 번성하는 부정과 비리의 은밀한 커넥션을 끊고 차단하는 것만큼
중요한 시대적 과제는 없다.
20세기 한국을 이끌어 온 두 영역인 교육과 언론 역시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부정의 거대한 뿌리가 왕성하게 번식하는 다른 직종은 왜 적시하지 않았는지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교사는 파워엘리트인가? 월급이라도 많으면 억울하지는 않겠다.
연구와 강의에 바쁜 교수들이 와인 한 병 선물받으면 죄인이 된다.
권력 실세와 연이 닿는 교수들, 언론방송계 부장급 이상의 간부들은 스스로 감시 대상이 될 각오가 절실하나
그래도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전문 교양직종으로 시야를 넓혀 보자. 제약회사가 의사·약사를 대접하는 것은 비리가 아닌가?
전문 교양직종으로 시야를 넓혀 보자. 제약회사가 의사·약사를 대접하는 것은 비리가 아닌가?
각종 협회의 이권 독점과 업자 매수를 비롯해 대기업 구매팀과 납품업체, 연구 담당 공무원과 과학자, 건축 시공사와 엔지니어,
종교인과 종교시설 관리자의 은밀한 답함행위는 어떻게 할까?
눈에 띄는 부정행위를 피할 방법은 수백 가지다.
3만원 이하 짜장면, 맥주 한잔 나눠 마시고 나중에 몰래 후사하면 최고의 파파라치도 따돌릴 수 있다.
김영란법은 감시와 처벌 수위를 높여 교정을 명령하는 ‘공화주의’의 발상이다.
김영란법은 감시와 처벌 수위를 높여 교정을 명령하는 ‘공화주의’의 발상이다.
감시비용이 치솟고 무엇보다 불신을 조장한다. 전 국민의 파파라치화(化)다.
그렇다고 자율의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도 안심할 수 없다.
‘공유지의 비극’처럼 공익이 무너진다. 그래서 양자의 단점을 보완하는 신뢰(trust)가 중요해지는 이유다.
신뢰라는 이 사회적 자본은 상층부의 이익 커넥션을 끊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건 혁명에 가까운 벅찬 일임이 분명한데 자율적 감시기제를 어쨌든 만들어 내야 한다.
한국의 상층부만큼 시민 참여와 절연된 계층도 없다.
교사·교수·언론인은 오히려 시민 참여에 활발하다는 점에서 김영란법은 자칫 신뢰를 만들어 낼 씨앗 직종을
부정의 온상으로 한정할 위험을 안는다.
형평성 문제가 있고 상층부 권력 카르텔엔 손도 못 대는 단점도 있다.
옛 친구이자 고참 기자 혼사에 부조금은 딱 10만원!
옛 친구이자 고참 기자 혼사에 부조금은 딱 10만원!
올가을부터는 공무원·변호사·교수 동창과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더치페이를 해야 뒤끝이 없다.
‘내가 쏜다!’고 외치고 나올 땐 포상금 노리는 파파라치를 조심해야 한다.
리스트에서 몸을 빼낸 정치인들이 권력형 갑질을 해대도 대체로 무사할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