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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기(李命基)

바람아님 2013. 7. 7. 09:09

 

 

 

이명기(李命基)
(1756년~? ;조선후기화가)

 

 

 

이명기(李命基)는 조선후기의 화가이다. 호는 화산관(華山館), 본관은 개성이다. 최고의 초상화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산수화는 화중인물과 바위의 모습, 필법 등에서 11살 연상인 김홍도의 화풍을 짙게

반영하고 있어 독자적인 개성은 뚜렷하지 못한 편이다.
또한 아버지, 동생, 아들 및 장인까지 도화서 화원으로 이루어진 화원집안 출신으로, 20대 후반에

이미 초상을 그리는데 있어 ‘독보일세(獨步一世)’라는 평가를 받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이다.

그는 정조 15년(1791)과 정조 20년(1796) 두  차례에 걸쳐 정조어진의 주관화사(主管畵師)를

맡았는데, 정조 15년의 어진제작 시에는 김홍도를 제치고 주관화사로 선발되고 있어 초상화에 있어서는

김홍도를 능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명기는 정조의 명으로 채제공의 초상과 17세기 거유(巨儒)인

허목의 초상 등을 그렸으며, 조선후기 권세 있는 사대부들이 모두 그에게 그림을 그려줄 것을 청하였다고

할 정도로 전문 초상화가로서 활발하게 활약하였다.

현재 이명기의 작품으로 밝혀졌거나 추정되는 초상화는 10여점 가량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채제공 초상, 오재순 초상, 김홍도와 합작한 것으로 유명한 서직수 초상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정조대의 명재상으로 유명한 채제공의 초상 2점등 그의 작품 몇점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직수 초상〉?〈관폭도(觀瀑圖)〉?〈산수인물도〉 등과 호암미술관

소장의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가 있다.

 

 

 

 

 

 이명기. 오재순 초상. 견본채색, 152×89.6cm, 리움 삼성미술관 소장.

  

이명기는 초상에 있어서는 김홍도를 제치고 정조의 아낌을 받았던 화원이다.  정조 시대를 통틀어 이명기는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두번이나 정조 어진의 주관화사가 되어 정조의 얼굴을 그렸고 정조가 아꼈던 정치가들 선비들, 강세황,

채제공, 오재순 등 많은 대신의 초상을 그렸다. 이명기는 최근 1756년 생으로 알려져 김홍도보다 11살 연하가 된다. 

 

김홍도와 합작하면서, 안면을 그리는 것에 김홍도가 한발 물러서 김홍도가 옷을 그리고 이명기가 안면을 그렸다는 것은 

이명기의 안면묘사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단한 수준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이명기가 그린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으나 다행히 그가 그린 사대부의 초상들이 다수 남아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재순 초상은 그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보다 시피 어느정도 서양화의 명암법이 적용되고 있다.  초상화는 정신을 담는

그림이라 해서, 일반적으로 매우 그리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위대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와같이 초상을

남겼는데 꺼려했던 만큼, 온 힘을 다해서 그 외모와 정신을 담아내야 했다.  이명기는 그것에 탁월했던 모양이다.

  

  

김홍도. 이명기 합작. 서직수 입상. 1796년, 견본채색, 148 x 7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직수는 정조가 무척 아꼈던 선비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다만 시서화에 능한 절개있는 선비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벼슬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그의 야복 초상화를 그리도록 김홍도와 이명기에게 특별히 명을 내렸던

듯 하다. 안면은 이명기가 그렸고 몸은 김홍도가 그렸다.  정조는 조윤형과 유한지 역시 특별히 예우하였다고 한다.   

 

 

 

 

             보물 1477호 이명기 채제공의 금관조복본 이정운 씀 비단채색 145.0cm X  78.5 cm 1784 

 

 

 

 

이명기 채제공의 금관조복본 (부분)

 

 

 

보물 1477호 이명기< 채제공 초상(흑단령포본)> 1792 비단채색 155.5cm X  81.9cm

  채규식(부여박물관 보관)

 

 

 

 

보물 1477호 이명기< 채제공 초상(흑단령포본)> 부분

 

 

 

 

 

 

 

이명기 채제공 초상 (사목본) 보물 1477호 비단채색 120 .0cm X 79.7cm 수원시

 

 

 

 

이명기 채제공 초상 (사목본) 부분

 

 

 

이명기, <채제공 초상 유지초본(72세상)>, 1791년경

유지에 채색, 65.5x50.6cm, 수원시, 보물 제1477호.

 

 

 

 

 

문정공 허목초상 

좌-채초본  유지 흑연 72.5cm X   47.2cm   

우- 채지초본  유지 흑연 71.5c

 

강세황 초상

 

m X   47.5cm    수원

윤증 초상


 

 

 

 

이명기. 초당독서도. 지본수묵담채, 103.8 x 48.5cm, 리움 삼성미술관 소장. 

  

이명기의 초상화를 제외하고 이런식의 산수인물도가 몇폭 전하는데 산수가 아닌 인물에 주를 두고 있다.  아마도 초상화를

그리던 화원의 습성인 듯 한데, 주로 고사를 다루고 있다 어느 정도 단원의 영향도 느껴지면서 보다시피 꽤 명확한 붓질을

보여준다.  

  

 

이명기. 죽림칠현도. 지본담채. 26.4 x 30.9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선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소폭 인물화로 죽림칠현을 그린 그림인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사랑스럽다. 인물의 꼬불꼬불한

의습선이 상당히 기쁠때 그린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든달까 뭔가 상당히 상기되어있고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그림이다. 

 

 

 


이명기_관폭도

 

 

 

 


이명기_산수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는 복헌의 사위였어. 자, 그럼 이 그림이 어찌된 영문인지 대충 감이 오지. 저 바위주름,

소위 단원준이라 하는 저 하엽준의 변형이 왜 그 그림에선 거꾸로 그려져 있냐는 말이지. 보긴 봤는데 필력이 딸리니

제대로 베낄 재주가 있나.

여기서 잠깐 !조선초상화의 정수이며 영원한 어용화사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간혹 아주 간혹 아트에 조예가 깊은신 분들이 이런 말씀들을 하죠.
 
"서양화처럼 사실감있는 그림이 왜 우리나라에 없을까?"라는........
아주 몽매한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림공부란 결국 많은 그림을 찾아서 원본을 보면 이런 말씀을 안하죠.

오히려 조선시대 영정그림이나 초상화는 상당한 리얼리즘을 가진 그림들로, 얼굴에 난 사마귀나 점을 비롯해 혈색까지도

정확히 재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합니다. 또한 임금의 얼굴인 어용을 그릴시에는 가장 솜씨가 빼어난 화원을 뽑아 얼굴을

전담케 했으며, 이 화원만이 유일하게 초상화를 제작하는 시간에는 임금의 얼굴을 뚫어지게 볼수 있었죠. 조선중기

이전에도 많은 초상화가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큰 전란과 함께 일제 강점기 시절로 인해 남아있는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조선후기의 초상화만이 전해져 오는 것이 유감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오늘 이야기한 이명기인데요. 이 사람은 여러 그림도 두루 잘했지만 워낙 초상이 뛰어나

정조어진을 제작할시 주관화사가 될 정도로 으뜸이었죠.

대개 여러분들이 조선시대 왕의 어진을 비롯해 서직수 초상, 체제공 초상, 이채 초상등등 현존하는 그림들을 보실때 이

그림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화가 혼자 그렸다고 생각하시면 안돼죠. 무슨 소리냐면 철저히 분업화 된 시스템을 가지게

됩니다.

 

1. 먼저 왕의 어진을 그리는 시기와 함께 어진을 그리는 일련의 일을 관장하는 부서가 생기고 이를 도감(都監)이라 하죠.

2. 도화서의 여러화원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컨디션이 좋고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소정의 시험을 치룹니다.

해서 선발된 화원들중 세 분류로 나누죠.

3. 임금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주관화사(主管畵師), 복식이나 어좌(왕의 의자), 바닥의 화문석등을 그리는 동참화사

(同參畫師) 색을 올리거나 밑바탕 작업을 해주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누어 철저히 분업화 했습니다.

4. 이런분들이 적으면 4명 많으면 16명 정도가 선발되는데, 현직 왕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선대 왕의 어진을 보수하거나

새로이 그릴때 마다 선발하기 때문에 일의 규모에 따라 적정의 인원이 선발되어 일이 진행됩니다.

5. 그러면 바로 그리느냐? 그렇지 않죠. 왕의 스케즐을 점검하고 가장 날이 좋은 시기에 주관화사만이 어진을 대할수가

있는데, 아무데서 하지 않죠. 숙종의 경우는 경희궁 뒷전의 경현당(景賢堂),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의 경우는 덕수궁 뒤의

정관헌(靜觀軒)에서 밑그림 즉 초지본이란걸 제작해서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