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06.17 이민석 기자/ 최주용 기자)
강남 봉은寺, 점심때 식당 개방… 지갑 얇은 회사원 행렬 줄이어
"국밥 한 그릇도 8000원 넘는데… 식비도 아끼고 채소 위주라 좋아"
지난 9일 오전 11시 40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코엑스 등 고층 건물이 숲을 이룬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곳에 단정한 옷차림의
남녀 직장인들이 속속 입장했다. 이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대웅전 옆
향적원(香積院)이란 건물이었다. 건물 앞엔 이미 20대부터 50~6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한 50여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이들의 손엔 1000원짜리
지폐가 한 장씩 쥐어져 있었다. 봉은사의 공양간(식당)인 향적원에서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이다.
봉은사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향적원에서 점심〈사진〉을 제공한다.
식당 입구에 설치된 '보시(布施·널리 베풂)함'에 1000원씩 내면 누구나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돈을 내지 않아도 식사를 할 수 있다.
10여분쯤 줄을 섰다가 들어간 향적원 내부 식당은 좌석 350개가
꽉 차 있었다. 메뉴는 취나물 무침, 겉절이 김치, 무짠지와 김칫국. 사찰 음식답게 고기는 없었다.
배식을 담당하는 봉은사 봉사단원들이 "식사 다 하신 분들은 여기 와서 백설기도 가져가시라"고 외쳤다.
인근 IT 회사에서 일하는 김성은(42)씨는 "강남에서는 국밥 한 그릇도 8000원이 넘는데 매일 나가서
먹는 게 부담된다"며 "점심값을 아끼면서 채소 위주의 건강식을 먹으려고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봉은사는 신도들에게만 식사를 대접했던 향적원을 지난 2006년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처음엔 불교 신도들과 인근 주민들이 자주 찾다가 차츰 소문이 나면서 주변 직장인들에게 명소가 됐다.
생업에 바쁜 택배 기사나 야쿠르트 아줌마, 환경미화원들도 봉은사 1000원 식당의 단골이 됐다.
이 절의 상인 스님은 "지난해까지 이곳을 찾는 직장인 수는 20~30명 남짓이었는데 올해는 50~70명으로
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했다. 경기 불황으로 직장인들의 지갑이 얇아지면서 생긴 새로운 풍경이다.
평일에는 평균 700명, 주말에는 관광객들까지 몰려 1500여명이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값 1000원으로 받은 수익금 전액 은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독거 노인들의
식사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
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식사 후 경건한 사찰 내부를 산책하면서 '힐링(치유)'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봉은사
점심의 매력이라고 직장인들은 말한다.
직장인 박상영(59)씨는 "정신없는 업무를 잠시 잊고 천천히 밥을 먹은 뒤 시원한 숲을 걷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