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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어느 '무조건' 후원자

바람아님 2016. 7. 15. 08:38

(조선일보 2016.07.15  양정웅 서울예대 교수·극단 여행자 대표)


양정웅 서울예대 교수·극단 여행자 대표지난 5월 내가 속한 극단 여행자가 서울문화재단 상주 프로그램으로 강동아트센터에 입주했다. 
늘 어두컴컴한 습기 속에서 지하를 전전하기 일쑤였던 연극인으로서 하드웨어 좋기로 소문난 극장에, 
그것도 '지상'에 입주하다니 정말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원들 모두 땅 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는 것에 신나 했다.

얼마 전 그곳에서 우리 극단 대표작 '한여름밤의 꿈'을 공연했다. 
그러고 나서 마치 땅 위로 올라온 일만큼이나 놀라운 일이 또 일어났다. 강동아트센터를 통해 어느 
독지가가 나타나 극단 후원을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20여년 동안 극단을 운영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런데 뭔가 조건이 있을 게 아닌가? 조건은 '무조건'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극단을 후원한다는 것이다. 항상 소망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분을 만나고 온 부대표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고 했다. 
"조금 당혹스러운데요. 보통 이런 경우엔 조건들이 있지 않은가요?" 단지 하나의 조건이 있긴 있었다. 
이름을 밝히질 말아 달라고. 그냥 후원하고 싶으니 방법을 고민해보라고. 
어쩌면 문화 후원에 조건이 없다는 것은 실로 멋진 일임에도 당혹스러울 만큼 놀라운 일이 돼 버린 것이다. 
우리가 늘 조건이라는 것에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지원조차 늘 '가이드'나 어떤 항목들이 붙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사일언] 어느 '무조건' 후원자
지난번 손해를 감수하고 뛰어든 어느 공연에서 소액의 프로그램북 판매 수입을 밀알복지재단에 장애 아동 후원금으로 보탰다.
물론 그 후원  에 어떤 조건을 내걸 순 없었다. 
그때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막연한 바람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봤다. 
'아이들이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 주기를….' 무릎을 쳤다. 
'아, 그러면 우리도 건강한 정신으로 재밌는 공연을 만드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그러면서 상상했다. 
전혀 당혹스럽지 않은 무조건의 후원들이 우리 모두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