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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진솔하기에 아름다운 이야기들

바람아님 2016. 7. 26. 23:34
[중앙일보] 입력 2016.07.2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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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한국현대미술관회 회장


우리 사회에서 ‘순박’ ‘정직’ ‘진솔’이란 낱말이 왠지 사치스러운 어휘로 멀어져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빌리 브란트(1913~92) 서독 총리가 남긴 일화가 생각난다.

1970년 12월 7일 서독 총리가 폴란드를 국빈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바르샤바에 있는 게토 봉기(Ghetto 蜂起·1943)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찾아가 헌화를 마친 브란트 총리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이른바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Kniefall von Warschau)’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추모 행사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브란트 총리와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하던 폴란드 동승자가 갑자기 브란트의 목을 감싸 안고는 울음을 터뜨렸다는 비화가 전해 온다. 사과의 진정성이 그만큼 감동적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이후 왜 무릎을 꿇었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이 잇따르자 브란트 총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바로 다른 나라도 아닌 독일의 오랜 숙적이자 큰 피해를 입은 폴란드가 자국의 수도에 빌리 브란트 광장을 조성해 그의 진솔하고 용감한 행동을 기리는 이유다. 한 정치가의 진솔함이 두 나라 사이의 오랜 원망과 갈등을 화해의 장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95년 4월 말 필자가 독일 베를린에 머물 때였다. 투숙한 호텔방의 TV를 켜자 때마침 독일연방국회의사당에서 거행하는 종전 50주년 기념행사를 중계하고 있었다. 5월 8일이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일인데, 그보다 며칠 앞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리타 쥐스무트 독일연방공화국 국회의장이 첫 연사로 등단해 개회사를 겸한 연설을 했다. 그는 나치 독일이 일으킨 2차대전으로 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났음을 참회하는 내용으로 운을 띄우고는 바르토셰프스키(W. Bartoszewski) 폴란드 외교장관을 그 자리의 특별 연사로 초청한 이유를 언급했다.

요컨대 나치 독일이 이웃 나라 폴란드 국경을 침략함으로써 대전의 비극이 시작되었고, 바르토셰프스키 장관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증인이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국회의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의 과제와 의무는 바로 젊은 세대에게 한 시대의 기억을 계속 전하면서 한때는 반대자이고 적이었더라도 파트너와 친구가 되어 유럽의 통일과 발전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독일인은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속죄의 발걸음 속에서도 화합을 추구하는 독일의 전향적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뒤이어 연단에 오른 폴란드 외교장관은 “1939년 9월 1일 독일 제3제국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유럽 역사상 가장 잔악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5년8개월8일 동안 계속된 전쟁 당시 폴란드가 주권을 되찾기 위해 연합군과 함께 육지와 하늘과 바다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음을 부각시켰다(폴란드 국민 60만 명이 정규군으로 참전하고 10만 명이 지하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

아울러 폴란드 외교장관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낱낱이 고발했다(나치 독일 점령 아래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인이 회생되고 강제 이주와 강제 노동을 했으며 영토의 5분의 1이 축소됐다). 그러고는 “과거를 청산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용감한 행위”라고 말하며 브란트 총리가 70년 12월 바르샤바의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경외스럽고 역사적인 용기의 표현”이라고 하며 울먹였다.

한 진솔한 사죄가 얼마나 긴 생명력을 지니는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정직’ ‘순박’ ‘진솔’이란 낱말의 진정성이 사라져 가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주해: 이 글은 독일연방국회의 1995년 4월 28일자 자료를 참조한 것임을 밝힌다.

이성낙 한국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