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8.15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의사(義士)와 열사(烈士)]
무력으로 항거하다 순국한 '의사', 맨몸으로 저항해 지조 지킨 '열사'
일본 왕족 처단한 조명하 의사, 독립운동 대모였던 남자현 열사 등
광복 위해 희생하신 분 떠올려봐요
오늘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았던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나고 우리 민족이 주권을 되찾은 광복절이에요.
광복은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맞서 싸운 결과랍니다.
안중근·윤봉길 의사, 이준·유관순 열사… 많은 순국선열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우리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그래서 광복절은 우리가 해방된 감격스러운 날이자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들의 뜻을
기리는 날이기도 해요.
그런데 순국선열의 이름 뒤에 붙는 의사와 열사라는 말은 어떤 뜻이고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의사와 열사 모두 순국선열이에요.
의사와 열사 모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순국선열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국가보훈처에서는 순국선열 중에
'무기를 이용해 항거하다 의롭게 순국하신 분'을 의사로,
'맨몸으로 저항하다 순국해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분'을 열사라고 정의해요.
이런 기준에 따르면 초대 조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과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군을 처치한 윤봉길은
의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를 알린 이준, 3·1만세 운동으로 거리에 나섰다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에 순국한 유관순은 열사로 부르게 되는 것이에요.
다만 김좌진·홍범도 장군처럼 독립군을 이끈 군인은 의사나 열사로 부르지 않는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의로운 일을 한 사람 중 양반은 의사, 평민은 열사라고 불렀다고 해요.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이런 구분 없이 일제에 항거하는 분들을 열사나 의사로 두루두루 불렀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도 한때 안중근 열사로 불리기도 했어요.
그러다 광복 즈음에 의사와 열사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때부터 의사와 열사의 기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어요. 이후 1970년대 국가보훈처의 전신인 원호처 산하에 있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지금과 같은
기준을 대략적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일본 육군 대장을 처단한 조명하 의사
의사와 열사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두 독립운동가를 알아보도록 해요.
조명하 의사는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일제에 강제로 빼앗긴 1905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어요.
군청의 서기로 일하던 조명하 의사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에 가기로 결심했어요. 상하이로 가기 전 타이완에 머물며 찻집 직원으로 일하던 조명하 의사는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타이완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조명하 의사는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데 앞장선 일본군의 대장이자 일본 왕족인 구니노미야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구니노미야가 타고 있던 차에 뛰어들어 그에게 칼을 휘둘렀어요.
- ▲ 조명하 의사는 1928년 타이완에서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일본 육군 대장
- 구니노미야를 처단했어요. /그림=이병익
하지만 조명하 의사가 휘두른 칼은 구니노미야를 스치기만 했고, 조명하 의사는 주변에 있던 일본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 순간에도 조명하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계속해서 외쳤다고 해요.
조명하 의사는 타이완 타이페이 형무소에 갇혀 있다 얼마 뒤 사형을 당해 순국하였습니다.
사형을 당하던 순간에도 조명하 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
저세상에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해요.
하지만 조명하 의사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어요.
조명하 의사가 거사 전 칼날에 미리 독을 발라뒀는데, 그 칼에 스친 구니노미야는 몸에 독이 퍼져 6개월 뒤 목숨을 잃었어요.
조명하 의사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뜻을 이룬 것이죠.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의거가 있었지만,
일본 왕족을 직접 처단하는 데 성공한 것은 조명하 의사의 의거가 유일하답니다.
◇독립운동의 대모, 남자현 열사
남자현 열사의 부군(夫君)은 구한말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의병에 참여했다 전사했어요.
부군을 잃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던 남자현 열사는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기로 결심했어요.
이미 4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한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 합류했어요.
이후 남자현 열사는 '독립운동의 대모(大母)'로 불렸어요.
군자금을 모으고 감옥에 갇힌 독립운동가들을 보살피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죠.
예순 살이 넘도록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남자현 열사는 만주국 전권대사이자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어요. 안타깝게도 무토를 처단하기 위한 무기를 가지러 가던 중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지요.
하지만 열사로서의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어요.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남자현 열사는 일본 경찰의 심문에 전혀 응하지 않았어요.
모진 고문에 죽기를 결심한 남자현 열사는 15일간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는 단식에 들어갔어요.
건강이 악화되어 뒤늦게 경찰서에서 풀려났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순국하였어요.
조명하 의사, 남자현 열사 외에도 수많은 의사와 열사가 우리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어요.
광복절인 오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의사·열사를 찾아보며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겨 보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