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문화비전] 위대한 기록 앞에 부끄러운 자화상

바람아님 2016. 8. 16. 10:16

(출처-조선일보 2016.08.16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4년마다 열리는 세계 기록인의 모임인 ICA(세계기록관리협의회) 총회가 다음 달 서울에서 개최된다. 
190여개 나라에서 2000여명이 참가하는 세계 기록인의 대축제다. 세계기록관리협의회는 기록의 
효과적인 관리와 보존, 세계기록유산의 보호와 활용을 주된 사업으로 하는 국제기구다.

유네스코는 1992년부터 '기록 유산이 인류 모두의 소유물이므로 미래 세대에 전수될 수 있도록 
이를 보존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로 세계기록유산을 선정해왔다. 
그 후 안네의 일기를 비롯한 348건을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 유산으로 정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등 우리나라 기록 유산 13종도 포함돼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거질의 역사 기록이 포함됐는데, 역사 기록물이 3종이나 등재된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 역사 기록은 인류사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우리 선조는 기록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당대의 일을 문자로 남겨 후대가 소중한 교훈으로 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과거가 곧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에는 왕과 신하 사이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진지한 대화, 
그리고 조선시대의 다양한 사회현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떤 것은 바로 옆에서 보고 듣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빠짐없이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보면 우리 선조의 엄밀함과 치열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특히 2억4000여 만 자의 승정원일기는 양에서도 단일 서종(書種)으로는 세계 최대이다. 
중국의 전 역사를 기록한 이십오사(二十五史)가 4000만 자인 데 비해 
인조 때부터 순종 때까지 288년간의 기록이 그 6배에 달하니 내용이 얼마나 상세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는 현재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20% 정도에 불과하다. 
완역을 하려면 최소 5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지금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환갑이 되어야 비로소 완역된 승정원일기를 볼 수 있다. 
일성록 완역도 20년이나 남았으며, 재번역 중인 조선왕조실록도 완료되려면 3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세계기록유산에 우리나라 역사 기록물이 3종이나 등재되었다고 들떠 기뻐하며 자랑스러워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자기 나라 역사를 그 나라 국민이 읽을 수조차 없는 현실을 정말 창피하게 생각해야 한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읽지도 못한다는 것은 국격(國格)과도 관계되는 문제이다. 
전 세계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산과 인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서두르면 한 세대 안에 우리말로 번역된 역사 기록을 모두 볼 수도 있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 그저 통탄스러울 뿐이다.

이번에 서울에 오는 세계 각국 기록인이 승정원일기의 구체적 내용을 물으면 우리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명색이 자기 조상이 쓴 자기 나라 역사책인데도 아직 5분의 4에 해당하는 분량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일 뿐이니 정녕 답답하고 부끄럽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