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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세계사] 중국 유일의 여황제, 정말로 냉혹한 악녀였을까

바람아님 2016. 8. 18. 18:58

(출처-조선일보 2016.08.18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측천무후]

두 아들 내쫓고 스스로 황제 등극
반대파 귀족 세력에 공포정치 펼쳐 능력 갖춘 사람만 관직 오르게 해
홍수로 고통받던 백성에겐 따뜻… 민심 얻어 50여 년간 권력 장악

오는 11월에 열릴 미국 대통령 선거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어요. 

미국이 세계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한 데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죠. 만약 힐러리가 당선된다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 동시에 

부부가 나란히 대통령이 되는 진기록이 세워지는 것이죠. 

힐러리로서는 최고 권력자의 아내에서 스스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지금부터 1300여 년 전 중국 당나라에 이미 최고 권력자의 아내에서 스스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예요. 

황제였던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성신황제'가 됐던 측천무후는 냉혹한 악녀이자 폭군으로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측천무후가 냉혹한 사람이었던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공포정치로 황제가 된 측천무후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예요. 무조는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의 후궁으로 황궁에 들어갔지만 황제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고 해요. 

태종이 죽고 고종이 왕이 되자 무조는 고종의 후궁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죽고 나면 자신을 낳은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아내들을 자신의 아내로 맞는 것이 북방 유목민의 풍습이에요. 

무조가 고종의 후궁이 된 것도 당시 당나라 지배층이 가혹한 환경에 살아남기 위한 북방 유목민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돼요. 고종의 후궁이 된 무조는 음모를 꾸며 황후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마침내 측천무후가 된 것이죠.

18세기 중국의 한 화가가 그린 측천무후의 초상화예요. 측천무후는 두 아들을 황제 자리에서 내쫓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예요.
18세기 중국의 한 화가가 그린 측천무후의 초상화예요. 
측천무후는 두 아들을 황제 자리에서 내쫓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예요. /위키피디아

이후 측천무후는 자신의 반대파를 가차 없이 제거하는 냉혹한 공포정치를 펼쳤어요. 

자신이 황후가 된 것을 반대하거나 자신에게 맞서는 신하들은 어떤 음모를 꾸며서라도 제거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당나라 황실에는 측천무후를 가로막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고, 

모두가 측천무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해요.

당나라 황실의 권력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고 난 뒤 자신의 셋째·넷째 아들을 황제로 앉혔어요. 

하지만 이마저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들들을 모두 황제 자리에서 내쫓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성신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고,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낙양(뤄양)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능력을 중시하고 백성을 아끼다

시안과 뤄양 위치 지도하지만 측천무후는 황제로서 뛰어난 정치를 했다는 평도 받고 있어요. 

비록 많은 관료를 죽이고 내쫓았지만, 그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몹시 아끼고 중용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해 무능한 귀족은 조정에서 

내쫓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관직을 얻을 수 있도록 했어요. 

중국 명나라 때 대사상가인 이탁오도 측천무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어요. 

"사람 알기를 무씨(측천무후)와 같이 한 사람이 있을까? 

오로지 인재를 사랑하고 기르는 마음을 가졌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하기를 무씨같이 한 자가 있을까?" 

중국의 역사서 '자치통감'에도 측천무후는 무능한 관리는 가차 없이 내쫓거나 엄벌을 

줬지만, 동시에 뛰어난 관리는 더 높은 관직을 주고 상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능력과 재능에 따라 관리를 뽑아 쓰게 되니 당나라 건국을 주도했던 귀족 세력은 힘이 약해졌지만, 뛰어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서 백성들의 삶은 한층 안정되었다고 해요. 

측천무후 덕분에 능력을 인정받아 관리가 된 신하들은 그 보답으로 측천무후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훗날 현종이 황제가 되었을 때 당나라가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측천무후 때 선발된 뛰어난 인재들이 

현종 때에도 그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해요.

이렇게 보면 측천무후는 귀족 세력에겐 냉혹한 폭군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누구보다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실제로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했던 50여 년간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해요. 

종종 일어났던 반란도 측천무후가 내쫓은 귀족 세력이 일으켰던 것이고요. 또 홍수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측천무후는 적절한 구제책을 내놓아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잘 돌보았다고 합니다. 여성으로서 50여 년간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이처럼 뛰어난 정치가였기 때문이에요.


◇측천무후가 힐러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황제의 아내이자 어머니, 그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천하를 호령했던 측천무후이지만, 

죽기 직전에는 결국 신하들의 반란으로 권력을 빼앗기게 됩니다. 주나라는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지요. 

측천무후는 죽기 전 자신의 무덤에 세우는 비석에는 글자를 새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어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무튼 이 비석을 '글자가 없는 비'라는 뜻의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르는데, 당나라가 멸망한 후 후대인들이 

이 비석에 많은 글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비석이 닳은 탓에 지금은 알아보기 어렵다고 해요.

역사를 보면 냉혹하지만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은 황제는 꽤 많아요. 

그런데 왜 측천무후는 유독 냉혹한 면만 강조되었던 걸까요? 혹시 측천무후가 여성이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역대 중국 역사가들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였던 측천무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1300여 년이 지난 지금 전직 대통령의 아내이자 전 국무부 장관으로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는 

힐러리는 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