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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칼럼] 광개토대왕비 우울한 진실

바람아님 2016. 8. 18. 23:39
[중앙일보] 입력 2016.08.1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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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대기자


정보는 국력이다. 정보는 사실 수집의 열정이다. 그것은 나라의 영욕(榮辱)을 가른다. 한·일 과거사도 거기서 갈렸다. 광개토대왕비에도 그런 사연이 얽혀 있다.

 대왕비(大王碑)는 감동이다. 비석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있다. 압록강과 가까운 만주 땅이다. 광개토(廣開土)는 만주다. 대왕의 시호는 단순하다. 간명함은 파괴력을 높인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통쾌해진다. 대왕비는 시련이다. 거대 비석은 유리 비각에 갇혀 있다. 중국은 고구려 위상을 깎아내렸다. 비석은 긴 세월 잠들었다. 세상에 알려진 시점은 19세기말. 그 주역은 제국(帝國) 일본의 젊은 장교였다. 그 사실로 우울해진다.

사코 가게노부(酒?景信·1850~1891)-. 그는 대왕비의 실질 발견자다. 사코는 첩보장교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 스파이. 1880년 그는 중국(청나라)에 파견된다. 베이징에서 1년간 중국어 공부를 했다. 그의 임무는 중국 북부와 만주의 측량과 지도 그리기다. 그의 활약은 의심과 도발이다. 그는 비문 변조설의 한복판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충격과 자극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격발시켰다. 광개토대왕의 위대함은 재조명됐다.

사연은 이렇다. 만주는 청나라의 금지(禁地)였다. 1870년대 후반 그곳은 개간지로 풀렸다. 농부들이 대왕비를 발견했다. 1880년대부터 관리들은 비석의 탁본(拓本)을 떴다. 1883년 사코는 그곳을 누볐다. 거대 비석의 발견 소식은 은밀하게 거래됐다. 사코는 현장을 찾았다. 그는 비석의 가치를 알아챘다. 탁본을 입수해 밀반출한다. 1884년 그것을 참모본부에 제출한다. 일본군 소속 학자들은 비문을 판독했다. 1888년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그때서야 조선은 비석의 존재를 알았다. 발표 내용은 논란과 의혹을 낳았다. 비문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과 연결했다는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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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자존심이 상한다. 왜 우리의 옛 지식인들은 비석을 찾지 못했나. 33세 밀정(密偵)에게 왜 선점당했는가. 윤명철 동국대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조선시대 용비어천가 등에 그 비의 존재가 적혀 있다. 하지만 비석이 금(청)나라 황제와 연관된 것으로 짐작했다.” 윤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조선의 성리학은 관념 위주다. 사실에 소홀하다. 비석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을 안 했다.” 신복룡(전 건국대 석좌교수) 교수의 시각은 실감 난다. “고비(古碑)를 찾은 행위자가 육군 중위라는 점은 놀랍다. 이역만리 오지에서 그것을 찾았고 그걸 판독한 참모본부 무리들이 자기 민족에게 유리하도록 비문을 변조했다면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의 우국적 열정과 역사의 경도(傾倒)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코의 성취는 불편하다. 하지만 시대를 압도했다. 나는 사코를 찾아야 했다. 그는 규슈 미야자키(宮崎, 옛 日向國) 출신이다. 그곳의 남쪽은 사쓰마(薩摩, 가고시마) 번령(藩領)이었다. 사쓰마는 메이지 유신의 근거지다. 조슈(長州, 야마구치)번과 함께 막부를 타도했다. 사코는 사쓰마의 패기로 무장했다. 그는 일본 육사의 구(舊)1기 출신이다. 1877년 포병소위가 됐다. 사코의 지도는 미국 의회도서관에 있다. 그의 작품은 세밀하다. 산둥과 만주의 지형과 지물, 군 진지가 그려져 있다. 그의 임무는 완수됐다. 탁본은 정한론(征韓論)의 근거로 악용됐다. 그가 만든 지도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활용됐다.

나는 친구 우치다 고스케(야마구치의 메이지 유신 150주년 기념회)와 사코를 찾았다. 우치다는 “사코는 19세기 말 동북아 정보·문화 전쟁에서 최고의 첩보원이었다. 사코는 대위 때인 1888년 12월 천황(메이지 일왕)으로부터 구리 꽃병을 하사받았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참모본부는 밀정들에게 두 개의 책을 읽게 했다. 하나는 리빙스턴의 여행기, 다른 하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가르침이 담긴 책이다. 쇼인은 ‘비이장목’(飛耳長目, 하늘 높이 귀를 열고 멀리 보아라)의 정보 마인드를 제자들에게 주입했다.”

그 부분은 특별한 흥미를 더한다. 나는 쇼인을 해부한 적이 있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이론과 인물을 생산했다. “아베 총리의 역사 도발엔 쇼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기사(중앙일보 2014년 1월 18일 15·16·17면)를 썼다. 사코를 통해 다시 쇼인을 만난 셈이다. 쇼인의 그림자는 길고 짙다.

사코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비문 변조설의 전모가 파악된다. 하지만 우리 학계 대다수는 ‘사코 알기’에 무관심하다. 한국의 풍토는 분석과 해설에 익숙하다. 사실 추적과 정보 수집은 허술하다. 그런 자세는 방어적이 된다. 비분(悲憤)의 감성에 젖는다. 한·일 관계의 바탕은 지피지기(知彼知己)다. 사실과 현장 확인의 선제적 자세가 중요하다. 일본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일본을 경계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친선을 다지기 위해서도 절실하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