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비(大王碑)는 감동이다. 비석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있다. 압록강과 가까운 만주 땅이다. 광개토(廣開土)는 만주다. 대왕의 시호는 단순하다. 간명함은 파괴력을 높인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통쾌해진다. 대왕비는 시련이다. 거대 비석은 유리 비각에 갇혀 있다. 중국은 고구려 위상을 깎아내렸다. 비석은 긴 세월 잠들었다. 세상에 알려진 시점은 19세기말. 그 주역은 제국(帝國) 일본의 젊은 장교였다. 그 사실로 우울해진다.
사코 가게노부(酒?景信·1850~1891)-. 그는 대왕비의 실질 발견자다. 사코는 첩보장교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 스파이. 1880년 그는 중국(청나라)에 파견된다. 베이징에서 1년간 중국어 공부를 했다. 그의 임무는 중국 북부와 만주의 측량과 지도 그리기다. 그의 활약은 의심과 도발이다. 그는 비문 변조설의 한복판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충격과 자극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격발시켰다. 광개토대왕의 위대함은 재조명됐다.
사연은 이렇다. 만주는 청나라의 금지(禁地)였다. 1870년대 후반 그곳은 개간지로 풀렸다. 농부들이 대왕비를 발견했다. 1880년대부터 관리들은 비석의 탁본(拓本)을 떴다. 1883년 사코는 그곳을 누볐다. 거대 비석의 발견 소식은 은밀하게 거래됐다. 사코는 현장을 찾았다. 그는 비석의 가치를 알아챘다. 탁본을 입수해 밀반출한다. 1884년 그것을 참모본부에 제출한다. 일본군 소속 학자들은 비문을 판독했다. 1888년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그때서야 조선은 비석의 존재를 알았다. 발표 내용은 논란과 의혹을 낳았다. 비문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과 연결했다는 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