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완벽한 임금' 정조는 후대에 왜곡된 허상"

바람아님 2016. 9. 4. 23:41
연합뉴스 2016.09.04. 08:01

노대환 교수 "규장각·장용영 등 고민 없이 전승하며 신화화"

 탕평정책으로 붕당정치의 폐단을 혁파하고 민국(民國)의 정치를 지향한 개혁가. 학술·정책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세우고 회화·음악에도 관심을 쏟아 18세기 후반 문예부흥을 이끈 성군. 조선 22대 임금 정조(재위 1776∼1800)의 이미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딛고 일어선 강인함, 화살 50발을 쏘며 신하들을 배려해 일부러 한 발을 놓쳤다는 일화를 더하면 팔방미인에 훌륭한 인격까지 갖춘 '완벽한 군주'의 표상으로 통한다. 세종과 더불어 '대왕'의 호칭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조에 대한 높은 평가는 동시대의 훌륭한 지도자를 갈망하는 심리가 반영됐다는 '반론'도 꾸준히 제기됐다. 노대환 동국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19세기 정조의 잔영과 그에 대한 기억'을 보면 각자의 입장과 욕망을 투영해 정조를 바라보기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노 교수는 계간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은 이 논문에서 "정조에 대한 일종의 신화는 그 신화를 필요로 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며 "그 과정에서 정조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거나 경우에 따라 왜곡되는 등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고 말했다.

정조의 호위부대인 장용영은 후대 임금들이 각자 왕권을 강화하려고 모방한 대표적 사례다. 헌종은 총위영, 고종은 무위소를 설치해 임금과 궁궐 수비를 맡기며 친위대를 키웠다.


그러나 정조의 장용영은 문제가 많은 조직이었다. 사적 기구를 위해 국가 재정을 전용하는가 하면 환곡제도로 운영비를 마련해 민폐를 야기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이서구가 정조 사후 장용영 혁파에 앞장설 정도였다.

그러나 헌종 등은 장용영을 집권기반 강화를 위한 기구로 기억할 뿐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다고 노 교수는 지적했다. 결국 총위영은 헌종 사후 원래의 총융청으로 되돌아가며 3년 만에 사라졌다. 무위소의 경우 권한과 권력이 집중되면서 기존 군영의 군사력 약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규장각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재교육을 받은 초계문신들이 고위직에 올라 임금에게 간언하지 못하고 복종하기만 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초계문신 출신인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의기가 움츠러들어서 감히 낯을 들어 일을 논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머뭇거리기만 하며, 문득 임금의 사인(私人)이 되어버리니…"라고 비판하며 규장각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규장각은 정조 사후에도 이어졌다. 이곳의 주요 관직을 독차지한 권세 있는 집안들이 존치를 원했기 때문이다. 규장각은 실질적인 기능은 못한 채 문벌 세력들의 근거지로 변질된 끝에 1884년 갑신정변 때 폐지대상으로 지목된다.

정조의 천주교 정책은 필요에 따라 기억이 왜곡된 대표적 사례다. 정조는 천주교가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하려고 집권 내내 교화주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고종 등 19세기 후반 임금들은 '정조가 천주교를 뿌리째 제거했는데도 뜻밖에 치성해졌다'는 식으로 천주교 탄압의 정당성을 정조에게서 찾았다.


노 교수는 "정조는 결코 완벽한 국왕이 아니었고 정조 통치기는 성세도 아니었다. 정조가 지향했던 국가 운영 방향은 옳은 것이었는지, 통치 방식은 적절했는지 등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이뤄져야 했다"며 "정조 시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이 그려진 정조는 실상과 동떨어진 허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역사비평은 18세기 조선의 중흥이 왜 19세기 세도정치와 망국으로 이어졌는지 규명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정조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기획 논문을 지난 호부터 싣고 있다. 가을호에는 정조의 탕평정치, 세제 운영 등을 다룬 논문 3편이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