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영화로 재조명된 김정호, 과연 옥에서 죽었을까?

바람아님 2016. 9. 15. 00:31
매일경제 2016.09.12. 15:04

[물밑 한국사-12] 대동여지도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지도 중 최대 크기다. 세로 6.6m, 가로 4.1m에 달해서 3층 높이 이상의 공간이 있어야 걸어 놓을 수 있다. 이렇게 커다랗기 때문에 같은 크기로 영인본이 나온 적이 없다. 193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3분의 2 크기로 영인본을 간행한 것이 최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사람은 고산자 김정호다. 대부분 중장년층은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김정호를 기억할 것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오르내리며 숱한 고생 끝에 지도를 완성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나라의 비밀을 함부로 알렸다고 하여 투옥되었고 대동여지도는 불살라졌다고 말한다. 그 글을 보면서 미개한 나라 조선에 대한 한심함을 절로 깨닫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대동여지도(규장각), 보물 제850-3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대동여지도(규장각), 보물 제850-3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김정호에 대한 이런 전설이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1925년 육당 최남선이 동아일보에 실은 글이 최초의 내용이었다.

 최남선은 이 글에서 그전까지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몇 가지 이야기를 던져 놓았다. △김정호가 만든 것 중 대동여지도 하나만 남았다는 것 △전국의 산천을 샅샅이 답사하고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올랐다는 것 △아내도 잃고 딸 하나와 함께 대동여지도를 판각하여 만들었다는 것 △지도 제작법을 서양인에게 배웠다는 누명과 우리나라 기밀을 외국인에게 알릴 것이라는 죄목으로 옥에 갇혔고 대동여지도 목판은 모두 압수당했다는 것 △청일전쟁 때 대동여지도가 그 가치를 드러냈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일제가 간행한 교과서인 '조선어독본'에 전기 형식으로 다시 게재되었다. 조선 팔도를 세 번, 백두산을 여덟 번 올라간 끝에 딸과 함께 대동여지도를 완성했으나 대원군이 나라의 비밀이 누설되면 큰일이라는 이유로 부녀를 옥에 가두고 지도는 압수했으며 결국 부녀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면서 최남선이 말했던 청일전쟁에 사용되었다는 구절은 이렇게 바뀌었다.


 "명치 37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대동여지도는 우리 군사에 지대한 공헌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 총독부에서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할 때에도 둘도 없는 좋은 자료로 그 상세하고도 정확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케 하였다 한다. 아, 김정호의 고난은 비로소 이에 혁혁한 빛을 나타내였다 하리로다."

 청일전쟁이 러일전쟁으로 바뀌었는데, 러일전쟁이야말로 일제가 자랑한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해전이었는데 대동여지도가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김정호
김정호
일제가 김정호에 대한 내용을 조선어독본에 실은 것은 조선을 폄하하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고 일견 타당성도 있어 보인다. 조선에 대한 폄하는 일제강점기 당시 모든 분야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 때문에 조선이라면 일단 멸시하는 풍조가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그 후 우리나라 국어교과서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가르쳤다는 데 있다. 심지어 조금 더 과장되었다. 일제가 만든 조선어독본에는 목판이 압수된 것으로 나오는데, 우리 교과서에는 압수한 뒤 불살라졌다고 쓰고 있었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 대한 내용은 없어졌지만 조선에 대한 비하는 강조된 상태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 나라를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그 지도를 보고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김정호의 피땀이 어린 지도의 판목까지 압수하여 불사르고 말았으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외국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호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찬란하게 빛나며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다. 아울러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신념은 우리에게 영원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김정호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동여지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부터 잘못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사실을 정리해보도록 하자.


 첫째,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하나만 만들지 않았다. 대동여지도뿐만 아니라 지리인문서인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였고, 지도는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등을 제작하였다.


 둘째, 대동여지도 판목은 대원군에 의해 불살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판목들이 남아 있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판목을 통한 연구로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더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셋째, 김정호는 옥에 갇혀 죽지 않았다. 김정호에 대해서 남겨진 기록을 보면 지도가 압수당한 바도 없고 옥에 갇힌 죄인이 되었다고 볼 근거도 없다.


 넷째, 지도 유통이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지도를 민간이 제작하거나 유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조선 전기의 상황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물품의 유통이 활발해지자 지도가 꼭 필요하게 되었다. 관리와 사대부들은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수진본지도를 애용했고 목장지도, 궁궐도, 역사부도 등 다양한 지도들이 등장했을 정도였다.


 다섯째, 대동여지도는 조선 지도의 계승자다. 최한기는 '청구도제'에서 김정호가 어려서부터 지도에 깊은 뜻을 두고 지도 제작의 장단점을 검토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정호가 최초로 만든 지도인 '청구도'는 정조 때 만들어진 '해동여지도'를 참고한 것이고 해동여지도는 신경준이 만든 '조선지도'를 변형한 것이다.


 여섯째, 김정호가 직접 팔도를 답사하고 백두산을 올랐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 김정호 당대 현실을 보아도 타당성이 없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지도제작자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 일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내용은 더 이상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다. 김정호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고 이우형, 이상태 씨 등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1997년 제대로 된 내용으로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가 개정되었다.


김정호는 고위 관료인 신헌과 최한기, 최성환 등 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아 지도를 제작하였고 판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기존 지도를 섭렵하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각종 지리서를 편찬한 위대한 지도 편집자였다.


[이문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