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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천재 이광수, '밀정' 아내와 이혼한 이유

바람아님 2016. 9. 17. 00:51
오마이뉴스 2016.09.16. 16:00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34] 효자동에서 '조선의 후쿠자와' 꿈꾼 춘원 이광수
[오마이뉴스 글:유영호, 편집:손지은]

이완용 가옥에서 동쪽으로 백운동천(현 자하문로)을 건너 약 100미터쯤 가면<연정>(종로구 효자동 175-1)이란 한정식집이 있다. 여기가 바로 춘원 이광수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살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 했으며, 1949년 2월 7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7월 12일 그를 북으로 데려가기 위해 북의 혁명시인 리찬이 찾아 온 곳이기도 하다.

춘원 이광수는 당시 홍명희,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렸다. 소위 그런 천재가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곳에 머물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가 살았던 이 집을 바라보며 70년 전으로 돌아가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원 이광수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살았던 효자동 가옥. 현재는 한정식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 유영호

이광수는 변절한 것이 아니라 원래 친일파였다

  ▲ 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 wikipedia
그는 일본 유학생시절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나름대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잃지 않았지만 3.1운동이 일제의 폭압으로 좌절되자 조선의 천재라는 그 역시 제국주의 권력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상해로 찾아온 허영숙과 애정도피 여행을 떠나고 안창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1921년 그녀와 함께 귀국하여 결혼하였다. 당시 이광수는 여러 글에서 귀국하면 자신이 징역을 살 것처럼 썼으나 허영숙과 함께 온 그는 간단한 조사만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5월 허영숙과 결혼식을 올렸고, 9월에는 사이토 총독과 면담을 하는 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하여 결국 이듬 해 자신의 변절을 상징하는 <민족개조론>(1922)을 발표하여 조선청년들을 분노케 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인하여 소설가 박종화는 '이광수의 변절은 총독부의 밀정으로 파견된 허영숙 때문'이라는 논란을 제기했고 이것은 여전히 지금도 논쟁 중이다. 하지만 나는 허영숙이 밀정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이광수의 변절은 이미 그 전부터 그의 삶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일본 유학시절부터 그런 경향을 보여왔다.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조선침략의 선동가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하여 이광수는 그야말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며, 자신 또한 '조선의 후쿠자와'를 꿈꿨다고 말했다.


이미 그에게 일본은 제국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며 '조선의 희망'이었을뿐 이다. 그런 이광수에게 허영숙이 없었더라도 그의 친일행위는 이미 

예약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했기에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광수가 아니라 천황의 신민인 고야마 미타로(香山光郞)일 뿐이었다.


해방 후 이광수의 '친일옹호론'

이랬던 이광수에게 조선의 해방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아마도 지옥같았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거세게 몰아치는 친일청산의 폭풍을 피해 일체의 작품활동을 중단한 채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약 1년간 은둔하였고, 1946년 5월 전처를 버리고 온갖 비난과 의심 속에서 재혼한 허영숙과 이혼을 한다. 이에 대하여 <서울신문>은 "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자)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백김구의 원본이 이광수의 첨삭으로
윤문된 채 출간된 <백범일지>
초판본(1947.12)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어쨌든 그는 미군정 속에서 발 빠르게 정세를 파악했다. 아직 좌우대립의 혼돈의 상태에 있던 1947년 그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를 통해 <도산 안창호>를 집필하였으며, 백범 김구를 찾아가 그가 기록해 둔 항일일기를 자신이 편집하게 해달라고 한다. 이런 행동이 자신에게 방패막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런 이광수의 행동에 대하여 심산 김창숙은 노발대발하였다. 친일파의 더러운 손으로 중요한 광복사료들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어쨌든 백범이 한자로 쓴 항일투쟁의 일기는 이광수의 손을 거쳐 한글로 우리 앞에 <백범일지>로 재탄생했다. 원문의 대대적인 첨삭과 '나의 소원'이란 명문을 새로 달고 말이다.

그리고 한 해 뒤 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정세를 정면돌파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정의 후원 속에 친일파들을 그대로 온존시키는 정책을 편 이승만 정권 하에서의 반민특위란 그에게 우스워 보였던 듯싶다. 그가 자신의 친일행위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청산 자체를 거부하는 논리로 집필한 <나의 고백>(1948.12)은 여전히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요논리로 등장한다. 결국 그는 1949년 2월 7일 반민특위에 의해 문학예술인 제1호로 체포되지만 불과 한달도 못 돼 석방되고 말았다.


 1948년 12월 친일옹호론을 위하여 출판된 이광수의 <나의고백>(좌)과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된 이광수의 모습
ⓒ wikipedia

한편 1906년 이광수와 함께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서 함께 수학한 것을 계기로 무척 가까웠던 벽초 홍명희와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일본 유학시절 둘 모두가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이광수는 친일로, 홍명희는 항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있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등이 창씨개명을 하기에 이르자 홍명희는 한용운을 찾아가 "여보게, 만해. 이런 개같은 놈들을 봤는가?"하고 울분을 토로했다. 이에 한용운은 "이보게, 벽초. 그놈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닐세"라고 대답했고 무슨 소리냐고 따져묻는 홍명희에게 "개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 저놈들은 개만도 못한 놈들이 아닌가? 개가 자네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섭섭해 했을 걸세"라고 했다. 이에 홍명희도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결국 홍명희는 1948년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남북협상회담에 참가하기 위하여 북으로 갔다. 그리고 떠나며 문중인사를 올릴 때 "이승만이가 김일성 반절만 되어도 안 가겠습니다"라고 한 말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말이다. 결국 홍명희는 이승만을 반대하며 북으로 갔고, 그의 친구 이광수는 이승만의 보호 아래 무사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이광수가 효자동에 살 때 보여줬던 그의 모습은 마치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 같은 느낌이 든다. 해방-친일청산-좌우대립-단독정권-전쟁-분단 이 모든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참으로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