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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당시 높은 레벨 情報는 한반도 관련 정보조차 한국에 제공 안 돼"

바람아님 2016. 9. 19. 21:16

(조선일보 2016.09.19 최보식 선임기자)

['한국계 美 스파이 사건' 그 후 20년… 訪韓한 로버트 김]

"韓 영해로 들어온 北 잠수함… 미국 3시간마다 관측했지만
당사국인 한국 정부에 정보를 통보해주지 않았다"

"보호관찰이 끝나고도 두 번이나 FBI에 불려가
거짓말탐지기 달고 조사받아…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

방한한 로버트 김(76)을 서울 광화문의 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체포된 지 꼭 20년 됐네요. 그때 내 나이가 지금 최 선생님(기자를 지칭)의 나이였습니다. 

당시 내 문제를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노인이 된 로버트 김을 보는 순간 마음이 짠했다. 1996년 9월 24일 밤이었다.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주관한 '국군의 날' 리셉션에 참석했다가 자리를 뜨려는 그에게 미 연방수사국(FBI) 직원들이 

"당신 자동차가 접촉 사고를 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데려갔다.

다음 날 워싱턴포스트의 1면에 '로버트 김이라는 한국계 미 해군정보관이 한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 TV 방송에서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그의 사건이 보도됐다. 

미 국무부 및 국방부에서는 "이번 사태는 매우 당황스럽고 우리는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논평을 냈다.

로버트 김은 “그 사건으로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고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됐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로버트 김은 경기고·한양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196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부친은 김상영(金尙榮) 전 공화당 의원, 동생은 김성곤 전 더민주 의원이다. 

그는 1970년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했고 4년 뒤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978년부터 미 해군정보국(ONI)에서 

정보분석관으로 근무했다. 미국의 여러 정보기관에서 수집·분류된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런 그가 중요 기밀 39건을 유출해온 것이다. 그 정보들은 주미한국대사관의 무관(武官) 백동일 대령에게 건네졌다. 

FBI는 체포 6개월 전부터 그의 사무실을 녹화하고 전화를 감청하고 우편물을 검열해왔다. 

그러던 중 강릉 앞바다에서 북 잠수함이 좌초했고 탑승 북한군들이 도주하는 사건(1996년 9월 18일)이 발생했다. 추적 및 

소탕 작전 끝에 북한군은 11명이 살해된 채 발견, 13명은 사살, 1명은 생포됐다. 우리 군인과 민간인도 17명이 숨졌다.

백동일 대령이 북 잠수함 관련 정보를 요청했을 때, 그는 '미국은 북 잠수함이 한국 영해로 들어온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정보를 한국 정부에 통보해주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북 잠수함을 거의 3시간 간격으로 이동 경로를 관측하고 있었다. 

한국의 영해로 들어온 북 잠수함은 두 척이었다. 그중 한 척이 동해안에 좌초된 것이고, 다른 한 척은 남해안 부근에 행적이 

나타났다. 동해 연안을 따라 제주도 남단으로 행적이 이어져 있었다.' 그게 마지막 정보 제공이었고 사흘 뒤 그는 체포됐다.

한·미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뻔했던 이 사건은 로버트 김 개인의 문제로 봉합됐다. 

그의 가족이 주미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사관 측은 '미 사법 당국에 넘어간 이상 우리로서는 그것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신했다. 한 달 보름 뒤 김영삼 대통령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분명히 말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 정부와 전혀 무관하고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스파이 혐의(espionage)'로 9년형+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았다.

"당초 내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내 컴퓨터로 지나가는 정보 중 한국 관련된 정보를 취합해 'K 파일'로 만들었고 이를 출력해 백 대령에게 우편으로 

보내줬어요. 스파이라면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안 했을 겁니다."

―한·미 간에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내가 컴퓨터로 접하는 정보마다 기밀 등급과 제공 표시가 돼 있습니다. 

한국으로 제공된 정보에는 'Released: Korea(제공: 한국)'로 표시됩니다. 그런 정보들은 정말 소수였어요. 

높은 레벨의 정보는 아예 한국에는 안 갔습니다. 심지어 한반도 관련 정보조차 영국·캐나다 등 다른 우방국에는 가지만, 

당사자인 한국에는 안 가도록 돼 있었어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잘못된 건지 건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을 때 일이 터진 겁니다."

―명색이 우리는 미국과 혈맹(血盟) 관계인데요.

"한국 정부는 자신이 알아야 할 정보가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합니다. 미국 정부에서 일해보면, 우리가 '맹방' '우방'이니 하는 건 한국 혼자의 

생각이고 미국의 국익에 따라 결정할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미국 워싱턴에 연수를 가 있던 1997년 가을,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자동차로 다섯 시간 걸렸다.

옥중(獄中) 인터뷰를 했던 것이다. 그때는 IMF가 터진 난국이었다. 

미국에 매달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국가 문제 앞에서 한 개인의 삶은 묻힐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로버트 김이 표지로 실린 월간조선 사진월간조선 1998년 2월호의 커버스토리로 카키색 죄수복을 입은 로버트 김의 사진과 함께 

실렸지만, 이런 생각에 몹시 우울했다.

"내가 표지로 나온 월간조선이 교도소로 반입되자 나를 '빅 피시(big fish·대어)'라고 

여겼어요. 교도소 측에서 해당 기사를 검열한 뒤 '보안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는

내게 넘겨줬어요. 내가 잊히지 않고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됐어요. 

마음 한편에는 '한국 정부는 왜 나를 이렇게 두나,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이냐'는 

원망도 있었으니까요."

국내에서 그 인터뷰를 읽은 이웅진(결혼정보업체 선우 대표)씨가 '로버트 김 구명위원회'를

결성해 후원금을 모았다. 김대중 대통령도 로버트 김의 동생인 김성곤 의원을 청와대로 

불렀고 내각에 석방 대책을 지시했다고 한다.

―미 연방법원에서 1심 판결이 이뤄진 뒤 항소했을 때는 기각됐지요?

"당초 유죄 인정 조건으로 재판부에서 1년 감형을 약속했습니다. 

정작 선고 날에 판사가 '당신은 미국 시민권자로서 국기 앞에 충성 맹세를 했다. 

앞으로 당신처럼 시민권을 받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해 1년을 더한다'며 원래대로 9년형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했어요.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됐습니다."

―당시 저도 막막한 기분이 들었는데, 9년을 잘 이겨냈습니다.

"아내가 매주 면회를 와서 '왜 그런 바보짓을 했냐'는 말은 하지 않고 교회 이야기만 하고 기도해줬습니다. 

신앙의 힘이 컸습니다."

―미국 교도소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내가 있던 교도소는 군대 내무반과 비슷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 공부하고 운동장에 나가 운동하는 시간도 있고, 또 개인마다 직업이 있습니다. 

나는 치과에서 조수로 일하다가 그 뒤 목공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2년쯤 지나서는 중국인과 히스패닉 재소자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교도소 내 법률도서관에서 일했습니다."

―일반 사회생활과 비슷하군요.

"자유만 없는 거지요. 규정을 안 지키면 '내부 감옥'에 감금됩니다. 거기서는 배식구로 식사를 넣어주는 진짜 감방이지요."

그는 출감 6개월을 앞두고 사회 적응을 위해 민영교도소로 옮겨졌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교도소였다. 

자동차를 갖고 와 사용할 수 있었다. 주중에는 차를 몰고 나가 바깥 세탁소에 일하러 다녔고, 급료도 책정돼 있었다.

"주말에는 집에 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집에 도착 즉시 전화로 경찰에 보고해야 합니다.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어요. 술을 마실 수도 없고요. 자유로워 보이지만 항상 감시를 받고 있었지요."

미국에서는 정상적인 수감 생활을 하면 15% 감형이 주어진다. 그가 2005년 출소하자, '보호관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관찰 동안에도 외출을 못 합니다. 발목에 전자 발찌를 차고 있어 집에서 약간만 벗어나면 신호가 갑니다. 

신문이 출입문에서 멀리 떨어져 배달되면 아내를 불러야 했습니다. 

교회와 병원에 가는 것은 미리 보고를 해놓으면 허용됩니다. 막내딸의 박사 학위식에는 허락을 받아 참석했어요. 

판사에게 보낸 청원 메일이 받아들여져 보호관찰은 1년으로 끝났습니다."

로버트 김과 최보식 선임기자 사진

하지만 보호관찰이 끝나고도 그는 두 번이나 FBI에 불려가 거짓말탐지기를 달고서 조사를 받았다. 한동안 감시당하고 있다는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작년에 복권(復權)이 됐다. 주지사에게 청원을 넣어 6년 만에 통과된 것이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우선 '경제 문제'가 해결돼야 하는데요.

"감옥에 들어가면서 파산한 뒤로 계좌와 신용카드도 중지됐지요. 지금은 회복됐습니다. 

FBI가 정보 제공의 대가로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게 있는지 샅샅이 뒤졌어요. 감옥에 들어가면서 수입이 전혀 없었지요. 

요즘은 월 2000달러의 연금생활자로 살아갑니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65세 이상이 연 4만달러 이상의 수입이 없으면 

매년 심사해 세금을 면제해줍니다. 그래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집 안에서 글을 썼어요. 국내 지인의 도움으로 인터넷에 '로버트 김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매주 연재했어요. 선진국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나이 든 사람의 잔소리 같은 글이었지요. '세월호 사건'이 터질 때까지 425회나 썼어요."

―왜 그때 멈췄습니까?

"그 사고가 난 뒤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추악한 면을 보면서 속이 뒤집혔어요.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어요. 건강도 나빠졌어요."

그가 이번에 방한한 목적 중에는 추석 성묘와 함께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기념회(9월 21일)가 들어 있다. 

그의 수감 동안 생활비를 부쳐줬던 김승연 한화 회장이 이번에 출판 경비 2000만원을 댔다고 한다.


―당초 감옥에서 나가면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을 텐데요?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겠다 같은 생각을 했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65세에 나와보니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어요. 그 사건으로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됐어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세월이 있었는데도 못 했고…. 가족에게도 미안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