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1] 세월을 탓하지 말라, 大義는 망설일 수 없는 것

바람아님 2013. 7. 29. 11:34

(출처-조선일보 2012.08.09 손철주 미술평론가)


호피(虎皮) 깔개에 앉았는데도 호랑이 등에나 올라탄 듯이 당당한 사나이다. 비록 죽은 놈이지만 호랑이가 그의 발아래에 머리를 잔뜩 조아린 꼴이다. 그는 떳떳하고도 날카롭다. 눈은 앞을 노려보며 부라렸고, 귓불은 뺨 뒤로 숨어 역삼각형 얼굴이 더 매섭다. 짙푸른 관복(官服) 차림과 공수(拱手)한 자세가 모난 구석을 도리어 감싸주는 구실을 한다. 누굴까, 이 사내는. 그림 속에 그의 정체가 적혀 있다. '충민공(忠愍公) 임장군(林將軍)'. '임 장군'이란 바로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임경업(林慶業·1594~1646)이다.

임경업은 병자호란 당시 붙들려가던 백성들을 구출한 영웅이었고, 청(淸)에 맞서 명(明)을 도와 나라 밖으로 용맹을 떨친 장수였다. 고집스레 대의와 명분을 좇았던 그의 말년은 불운했다.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쓴 그는 형장에서 스러졌다. 그의 불우한 이미지는 후대의 가슴에 남아 소설로 각색되었고, 무속에서는 수호신으로 등극했다.

'임경업 초상' - 작자 미상, 비단에 채색, 150.2×91.5㎝,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경업의 생김새를 더 뜯어보자. 눈시울은 위로 뾰족하고 콧대는 다릿기둥처럼 단단하다. 얇고 가는 입술은 쌀쌀한 기색을 띤다. 수염은 흉배(胸背) 가운데로 늘어질 만큼 길렀고, 웃자란 눈썹 털 서너 개가 눈두덩을 찌르고 있다.

무엇보다 탁자 위의 기물(器物)들이 흥미롭다. 왼쪽에 사자처럼 생긴 것은 산예( 狻猊)다. 용(龍)의 아들인 이 녀석은 불과 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향로 장식에 맞춤하다. 아닌 게 아니라 입에서 파르스름한 향을 뿜고 있다. 꽃병에도 동물이 새겨져 있다. 도마뱀을 닮은 석룡(蜥龍)이다. 석룡은 싸움을 무척 즐긴다. 병에 꽂힌 것은 소나무·대나무·매화인데, 문인들이 흔히 일컫는 '힘든 세월을 건너가는 세 벗'에 해당된다. 문(文)과 무(武)의 상징을 슬며시 초상화 주인공에 끼워넣은 셈이다. 위인을 기리는 마음씨가 정성스럽다. 

(참고-부분확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