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보존하고 일으키는 길은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데 있고,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려면 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을 지금의 한글 모습으로 재정립한 근대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말이다.
선생은 1876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서당 훈장이던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지만, 어려운 한문에 회의를 느끼고
우리말에 관심을 가졌다. 11세 때 큰아버지를 따라 상경,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배재학당 만국지지학
(역사·지리) 강사였던 서재필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한글계몽 운동’으로 의기투합했다. 선생은 이듬해 발간된 독립신문의 교보원
(교열 보는 사람)으로 임명됐다. 국어사전 편찬과 동식법(맞춤법) 연구를 위해 훗날 조선어연구회와 한글학회의 씨앗이 된
‘국문동식회’를 만들었다.
1898년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치른 옥고는 선생에겐 ‘시련’이었으나 대한민국 한글 역사엔 ‘축복’이었다. 일체의 대외활동을
접은 선생은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898년부터 집필한 ‘대한국어문법’을 1906년 완간했고, 1908년
‘국어문전음학’을, 1910년 ‘국어문법’을 발간해 한글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1907년엔 국어강습소를 세우고, 20여곳의
학교에 책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선생의 별명 ‘주보따리’는 이때 생겼다.
최현배 심명균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밤낮으로 우리말 연구에 몰두했던 선생은 1914년 여름 38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 병을 앓았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99년 전 7월 2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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