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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권도 창시자' 李小龍

바람아님 2013. 8. 1. 16:19


“물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듯이, 무술도 상대와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한다.” 춤을 추듯 허공을 가르는 쌍절곤,

괴성과 함께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민첩성, 결정타를 날린 뒤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는 묘한 표정….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李小龍)은 33세로 요절했지만 단순한 무도인이나 영화배우 이상의 이미지를 세상에 남겼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설명이다. “이소룡의 ‘절권도’라는 책을 읽은 뒤 그에 대한 피상적 견해가 불식됐다. 그는 깊이 있는 사상가였다.”

이소룡은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홍콩 경극배우였던 아버지의 부부동반 순회공연 중이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생후 3개월 때부터 영화에 출연, 1958년까지 23편의 영화에 나왔다. 당대 고수 엽문으로부터 ‘영춘권’을 배운 이소룡은

말썽꾸러기였다. 부모는 1959년 그를 미국으로 유학보냈다. 시애틀 워싱턴대에 입학해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대학을 중퇴하고 쿵후 도장을 차렸다.

1964년 우연히 참가한 가라테 대회가 그의 운명을 바꿔놨다. 현란한 무술에 매료된 영화 관계자들에 의해 영화 ‘그린

호넷’(1966)에 출연했다. TV드라마에도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지만, 그의 마음은 홍콩을 향해 있었다. 홍콩으로 돌아온 후

첫 주연작 ‘당산대형’(1971)과 두 번째 영화 ‘정무문’(1972)은 그를 ‘홍콩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도 러브콜이 왔다. 85만달러의 제작비로 2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합작영화 ‘용쟁호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73년 여름 뇌질환으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40년 전 7월 2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