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놀이하다 사람들 다치고 죽어… 왜?
설 풍속 중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진 것이 있다. 돌싸움(石戰·편싸움으로도 불림)과 횃불싸움이 대표적이다. 돌싸움은 1920년대 말까지 매년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흔하게 있었던 놀이다. 일제 강점 초기까지 서울에서도 성행했다.
"유년시절 편싸움이 유명하기로는 남대문 밖 굴개현(서울역 일대)과 동대문 밖 무당개울(무학동) 그리고 서대문밖 녹개천(북아현동)
과 문안에서는 하남촌조산(장충동)의 편싸움이 이름 높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무렵 내가 직접 관전할 수 있었던 편싸움은 서대문밖
녹개천에서 어울린 삼개(마포)패와 만리동 패거리의 편싸움이었는데, 그실 나의 10대 시절만 하더라도 서울에서의 편싸움은 벌써
그 명맥이 다할 때였다.
"유년시절 편싸움이 유명하기로는 남대문 밖 굴개현(서울역 일대)과 동대문 밖 무당개울(무학동) 그리고 서대문밖 녹개천(북아현동)
1993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서울팀이 만리현 돌팔매 편싸움 놀이를 하고 있다.
그날 싸움판은 녹개천을 사이에 두고 쌍방이 팽팽히 맞섰는데 양편 앞머리에는 모두 올망졸망한 개구쟁이 때를 못 벗은 사내애들이
한몫 자리 값을 톡톡히 하고 늘어섰었다.
그 뒤편으로 젊은 장정들이 줄지어 섰는데… 연방 팔죽지를 앞에서 뒤쪽으로 돌리면서 원을 그려 돌팔매질을 하였다. 그러면
이편저편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아이쿠' 하는 비명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곤 했다. 그런데 이때에 우박비 쏟아지듯 하는 돌의
세례보다도 싸움판을 더욱 점입가경의 경지로 이끄는 구경거리가 있으니 이 싸움판에 끼어든 조무래기 자식들을 찾아 나선
아낙네들의 아우성이다. '개똥아', '칠성아', '만복아' 하는 째지는 금속성의 연타성(連打聲)이 그대로 아비규환의 도가니를 이룬다.
어쨌든 보는 자의 입장에서는 한 대목 구경거리로는 일품이었다. 이런 난장판에 뛰어들었다가 어느 놈이 던진지도 모를 돌멩이나
방망이에 맞아 박이라도 터져 죽어도 이판에 '살인(殺人)없다'는 말이 그대로 실감나게 한다. 이처럼 한바탕 싸움판이 잘 어울려서
한창 판을 도는 판국에 난데없는 왜놈 기마헌병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금세 싸움판은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기세가 꺾여들어
기마헌병들이 불어대는 호루라기와 내두르는 총검에 쫓겨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싸움꾼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어이없게도
싸움판은 파장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 < 풍류세시기 > , 1977)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격렬한 놀이
삽화가 이승만의 기록처럼 돌싸움은 1910년 이후 서울에서는 일제에 의해 타파해야 할 폐습 혹은 악습으로 지목되어 사라졌다.
다른 지방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 때 사라진 전통문화 중에는 충청도 풍속이었던 횃불싸움, 강원도와 경기도의 차전(車戰)
이 있다. 횃불싸움도 돌싸움처럼 사람이 다치고 죽는 격렬한 놀이였다. 다만 어른은 어른대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각각 상대를
이루어 횃불을 휘두르며 백병전처럼 싸웠다.
차전놀이는 19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가 될 정도로 높게 평가받았다. 역사적인 연고가 있던 안동과 춘천, 가평 등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빈번했던 돌싸움과 횃불싸움은 일부에서 이벤트성으로 재현되는 경우는 있으나, 여전히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돌싸움과 횃불싸움은 모두 고대인들의 전투에서 생겨난 전통이며, 공동체의 협동정신을 키우기 위해 생겨난 풍습이다. 또한 줄다리기
와 윷놀이, 차전놀이와 같이 이기는 쪽은 풍년이 들고, 지는 쪽은 흉년이 든다는 농사의 흉풍을 미리 예측하는 점복의 기능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 국가방위 수단으로 활용
그 중 돌싸움은 중국 역사서인 < 수서 > (隋書)의 고려전에 고구려의 정초 풍속으로 기록될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고구려 왕은
패수에서 했던 돌싸움을 직접 참관했다고 한다. 그 전통은 계속 이어져 고려 때의 기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돌팔매를 잘하는 사람을 모아 '석투군(石投軍)' 혹은 '척석군(擲石軍)'이라는 특수부대를 운영했다. 또한 5월 단오 축제 때의 최고의
볼거리였고, 뛰어난 전사를 선발하는 기회로도 활용했다. 그래서 고려 때 문신이며 학자인 목은 이색은 단오 돌싸움에 대해 '해마다
단옷날엔 악바리 청년들 모여들어(年年端午聚群頑) / 양편으로 갈라서서 돌 날리며 싸우는데(飛石相攻兩陣間)'라고 시로 읊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돌싸움을 군사적 목적으로 권장을 하기도 했고, 반대로 인명 중시로 강력히 금지하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때의
척석군과 같은 부대를 만들었고, 태종은 이질을 앓으면서도 구경할 정도로 즐겼다. 그러나 세종은 많은 인명이 죽고 다쳤기에 부정적
으로 보아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세종 때에도 돌싸움은 중단되지 않았다.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 등 일부 종친들은 돌싸움을
시키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세종은 법을 위반한 관련 종친 일부를 귀양보냈다. 세종 이후에도 돌싸움 금지령은 수시로 내려졌다. 이는 민간에서 여전히 돌싸움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돌싸움을 악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조 1년의 기록을 보면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해도 어떤 책임을 묻지 않는 돌싸움 관행을 이용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던 것이 적발되기도 했다.
영국 잡지 < 더 그래픽 > 1902년 2월8일자에 실린 돌싸움 묘사 삽화.
나라의 금지와 백성들의 무시가 반복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상무(尙武)전통에 따라 국가방위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1510년, 중중 때 일어난 삼포왜란과 임진왜란 때이다. 삼포왜란 때는 방어사 황형과 유담년이 김해의
돌팔매질을 잘하는 백성들을 선봉으로 삼아 왜적을 대파했다. 임진왜란 때는 안동판관 윤안성이 돌싸움꾼으로 부대를 만들었고,
권율의 행주대첩에서도 공헌했다. 그런 까닭에 그 후 안동과 김해에서는 금지법에도 불구하고 고을 수령들의 묵인하에 각각 매년
정월과 5월 단오에 돌싸움을 했다.
돌싸움과 관련한 조정과 백성의 숨바꼭질은 조선 말기인 고종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종 2년(1865년)에 편찬된 조선 최후의
법전인 < 대전회통 > (大典會通)에서는 돌싸움이나 차전(車戰) 등을 한 사람에 대해 곤장 100대와 귀양 처벌을 내린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법을 지키지 않았다. 고종 24년인 1887년 2월 17일에는 고종이 "지난번에 석전을 금지하는 일로
신칙한 적이 있는데, 들으니 한결같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다"며 조정의 관련 부서장들인 형조판서·한성판윤·좌우포도대장 등을
크게 질책했다.
최근에 일부 지자체서 재현 이벤트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한반도는 흥미로운 먹잇감이었다. 조선 침탈 위협을 느낀 고종도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고종도 협동심
조성과 국토방위를 위한 투쟁심을 자극할 수단으로 돌싸움의 순기능을 주목하고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이 돌싸움 금지를 푼
이유를 유추강(庾秋崗)은 이렇게 말했다.
"골브란이란 서양사람이 경성에 처음으로 전차를 만들어 내놓고 나서 손님을 끌려는 술책으로 나라에 말씀드리기를 편싸움이란
국민에게 상무정신을 고취시키는 훌륭한 것인데 그런 걸 없애다니 될 말입니까 어쩌구저쩌구 해 가지고 다시 부활시킨 것이지요."
(조선 무예와 경기를 말하는 좌담회, < 조광 > , 1941.4.)
고종은 콜브란(Henry Collbran)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돌싸움터였던 애오개를 정식 싸움터로 지정했고, 콜브란도
전차사업에서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콜브란과 달리 다른 외국인들은 흥미롭게 혹은 위험한 놀이로 보았다. 조선을 다녀간 뒤
우리나라의 전통놀이를 < 한국의 놀이(Korean Games) > 란 책으로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은
우리의 다양한 놀이의 하나로 소개했다. 반면 미국 공사 알렌은 1905년 3월 초에 하남촌(장충동) 근처에서 벌어진 돌싸움으로 인해
인근에 있던 미국인 집에 돌이 무수히 날아들어 위험했다면서 엄중히 조사하고 엄단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돌싸움에 끼어든
외국인도 있었다. 1903년 2월 5일, 대보름을 앞두고 서울의 주요 돌싸움터의 하나였던 만리재에서는 약 9000명이 참가한 대규모
돌싸움이 벌어졌다. 운산금광 직원 미국인 클레어 헤스(Clare Hess)는 구경을 하다가 자신 앞에 날아든 돌멩이를 집어 싸움꾼 속에
내던졌다. 그러나 헤스가 던진 돌멩이는 사람을 다치게 했다. 헤스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돌싸움의 예외규칙을
적용받지 못하고, 부상자에게 치료비를 물어주고 조선을 떠나야 했다.
순종은 1908년 정월에 다시 금지 명령을 내렸고, 서울에서는 강력한 단속이 이뤄졌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민족말살과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돌싸움 기사가 거의 매년 정초의
사건사고 소식으로 등장했다. "석전소동(石戰騷動)", "대동군 석전(大同君石戰), 일명(一名)이 참사(慘死)", "폐풍(弊風)의
석전(石戰)끄테 쌍방(雙方) 돌격전(突擊戰)" 등의 기사제목이 그것이다.
돌싸움과 횃불싸움은 해방 이후 몇 십년이 지난 최근에야 일부 지자체에서 재현 의미의 이벤트로 간혹 시선을 끌고 있을 뿐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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