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역사 속 숨은 영웅 (8)]'나라 구하겠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걸들

바람아님 2016. 10. 6. 23:51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후대에 잘 알려진 위인 외에 많은 여성 영웅들도 있었다. 그동안 몰랐던 숨은 여걸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 구성·편집=뉴스큐레이션팀
  • 조선일보 : 2016.10.06 08:14 | 수정 : 2016.10.06 08:43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만주의 호랑이' '여자 안중근'… 남자현

일제에 남편 잃고 '독립군의 어머니'로…
남자현 의사는 1872년 경북 안동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했으며, 7세 때 국문에 능통하여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했다.

19살에 아버지의 제자였던 김영주와 결혼했다. 남편 김영주는 의로운 사람으로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있겠느냐"며 경북 영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도현 휘하에 자진 입대했는데, 일제와의 전투중 전사했다.


남편을 잃은 의사는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養蠶)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1919년 3·1운동으로 조국 독립의 열망을 느끼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 가입했는데, 그의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였다. 그는 독립군의 뒷바라지도 도맡아 하며 북만주 일대의 농촌에 12개의 교회를 건립했고,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했다.


동분서주하며 독립운동… 손가락도 잘라 의지 다져 
의사는 1925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독립운동가 김동삼 구출 작전에 참가하는 등 위험한 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1932년 9월에 국제연맹* 조사단이 침략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다. 그는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본인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했던 것이다.

1933년 초, 의사는 동지 이춘기 등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제거하기로 하고 2월 29일 거지로 변장했다.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신징(新京, 현재 장춘)으로 가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혔다.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의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 국제연맹: 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 세계평화를 목적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설립된 국제기구. 지금의 국제연합(UN)의 전신이다.

2015년에 열린 독립기념관 특별기획전 '전통 초상화법으로 보는 독립운동가'에서의 남자현 의사의 초상화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운동가'

"독립은 정신에 있다" 유언 남기고 단식(斷食)으로 순국
의사는 1933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은 보석으로 석방했는데, 이후 의사는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여관으로 옮겼으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의사는 유복자인 독자 영달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했다. (이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김구, 이승만에게 이를 전달했다고 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의사는 1933년 8월 22일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된 남자현 의사는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알려졌다.

(왼쪽)남자현 의사의 묘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운동가', 영화 '암살'의 한장면 /쇼박스

의사의 순국 소식에 당시 하얼빈의 한인들과 중국인들은 그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애도를 표했다. 의사의 유해는 하얼빈 외인 묘지에 묻혔다가 1967년 7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國定 역사교과서, 영화 '암살'의 모델 남자현 등 여성 독립운동가 소개 늘려

임신한 몸으로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항일투사, 안경신

3․1만세운동에 이어,
항일여성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안경신 의사는 1888년 평안도 대동에서 태어나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서문동에서 적극 참가했다. 평양 서문동은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남산현교회가 있는 곳이었다. 의사는 만세운동 가담으로 체포되었다가 29일간 유치되었다.

3·1만세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이하 '임정')의 수립과 함께 전국적으로 임정과 연결된 많은 항일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조직을 만들어서 임정을 후원하고 지지했다. 의사는 임정 수립 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며 모집한 군자금을 임정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투사가 되어 임신한 몸에 폭탄을 숨기고 거사
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의사는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정의 군사기관인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했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7~8월경 미국의원시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고자 폭탄 거사를 실행하기로 했다.


결사대 중 제2대에 파견된 그는 폭탄을 직접 소지하고 평양으로 잠입하였다. 거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평양 시내에 뿌린 경고문의 영향으로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가 있었으나, 1920년 8월 3일 밤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등에 폭탄을 투척하여 평남도청 제3부인 평남경찰부 건물을 파괴했다.


의사는 당시 임신한 상태임에도 거사를 주도했으며, 출산 직후인 1921년 3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평양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이후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미지 크게보기
안경신 의사 체포를 보도한 1921년 5월 10일자 매일신보 /독립기념관

의사는 무력적인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고, 임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평양 시내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에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프라이즈' 방송 캡처

죽음 두려워하지 않은 '여성항일투사' 안경신

"나라를 구하는 데에 남녀의 구별이 있을쏘냐"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윤희순 지사는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의 큰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익상은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윤희평의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었다. 그는 16세가 되던 해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과 결혼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 중에 1896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춘천에 있던 시아버지 유홍석도 춘천유림들과 함께 의병운동에 나섰다.

그가 의병운동에 뜻을 둔 것은 이 때부터였다. 시아버지가 의병활동으로 10달간 집을 비운 사이, 그는 매일 아침 시아버지의 무사 귀가와 의병의 전승을 기원했다. 또 의병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밥을 달라고 요구하면 기꺼이 가족들이 먹어야 할 쌀과 곡식까지 몽땅 털어 저녁밥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제작하며 구국활동을 촉구


그는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일본이 아무리 강성해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쉽게 이를 물리칠 수 있다. 여자라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며,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그러므로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줘야 한다"며 의병을 도와주자는 내용의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일깨웠다.

이미지 크게보기
윤희순 의사가 직접 쓴 '안사람 의병의 노래' 사본. "자주 읽어보고 외워두라"는 당부가 적혀 있다. /소년조선일보

30여 명의 여성의병 조직
1907년 일본이 한국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춘천에서 유중악, 유영석, 유제곤 등과 함께 의병 600명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지사는 초기 을미의병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후기 춘천의병에 참여했던 의병장의 부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들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금했다.

그는 이 자금으로 가정리 여의내 골에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을 모아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는 탄약 제조소를 운영했다. 그리고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했다. 여성의병은 의병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 하는 등 의병훈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지사는 직접 의병 훈련에도 참가했으며,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에 나서기도 했다.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인재양성, 항일 연대단체 조직
가족들과 중국으로 망명한 지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에 이회영, 우병렬, 우병렬의 부인 채인산, 중국인 도원훈과 손홍령의 도움으로 환인현 보락보진(지금의 랴오닝성 번시시)에 노학당(勞學堂)을 창립했다.

학교운영자금은 그와 학생들이 환인지역의 조선인, 중국인들에게서 모금한 것으로 충당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15년까지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등을 비롯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5년 일본에 의해 노학당은 폐교되어 버렸다.)

힘든 항일운동을 하는 와중에 1913년에 시아버지가, 1915년에는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잃고 노학당까지 폐교 당하자, 지사는 1915년 막내 아들 교상을 데리고 무순 포가둔(鮑家屯)으로 이주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했다.

독립운동으로 아들이 숨진 후,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나다
1930년대 초, 지사는 요녕성 동고촌 뒷산 밑으로 이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도중 일본군이 들이닥쳐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조선독립단원들은 산속에 숨어 지냈으며, 여자 가족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등 가족들과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 때 지사는 그 삶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신세타령'이라는 가사를 지어 당시의 어려운 정황을 묘사했다. 가사 속에서 일본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어 항상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갈 곳도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윤희순 지사가 지은 '신세타령' 가사 /내용출처=국가보훈처

지사는 중국인의 집과 친척 집을 돌며 피신하다 해성현 묘관둔(海城縣 苗官屯)으로 이사해, 다시 이곳을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아들 유돈상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장인 음성국과 함께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 후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집에 돌아오던 중, 어머니 윤희순 지사의 품 안에서 순국했다. 지사도 얼마 후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이 숨진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이었다.


여성의병단 조직… '안사람 의병가' 지어 동참 이끌어

출처=국가보훈처 배너(114×32)